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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 임진왜란 참전 明軍에 대한 기억

The Memories of Ming Dynasty's Army in Imjin War during the 17-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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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참전한 명군의 영향은 17-18세기 조선 사상계에 再造之恩의 이데올로기로 지속되었다. 만력제가 파병한 원군 덕분에 조선이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재조지은의 관념은 숙종대 大報壇 설립으로 귀결되었는데, 대보단 이전에도 이미 임진왜란 참전 명군의 흔적을 간직한 몇 곳의 제단과 사당이 건립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590년대에 건립된 愍忠壇․武烈祠․宣武祠였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 조정의 요청에 따라 설립된 민충단은 평양․개성․벽제․한양 등 4곳의 격전지에 전사한 명군들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제단이었다. 그리고 명군의 평양성 탈환을 기념하여 세운 평양의 무열사는 1596년(선조 29) 무렵 완공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는 원병 파병을 주도한 병부상서 石星 및 평양 전투를 지휘한 제독 李如松과 楊元․李如栢․張世爵 등 5명의 화상을 봉안하였다. 뒤이어 1598년(선조 31)에는 한양 太平館 서쪽에 정유재란 때의 병부상서 邢玠의 화상과 선조의 어필 ‘再造藩邦’을 봉안한 선무사가 건립되었고, 1604년(선조 37)에는 楊鎬의 화상이 배향되었다. 그러나 인조대 정묘․병자호란 및 뒤이은 명청교체의 결과, 명군을 기념하는 이들 壇廟의 제사는 제대로 시행될 수 없었다. 한편, 임진왜란이 끝난 뒤 상당수의 명군들이 군영을 이탈하여 조선에 정착했다. 또한 명나라 멸망 이후 임란 당시 명군 지휘부의 후손들이 대거 조선으로 망명했는데, 이들은 임란 종료 후 곧바로 만주족과의 전투에 참여했기에 청조 치하에서 살아가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왜란 당시 자신들이 조선에 베푼 ‘은혜’를 상기시키며 조선인들의 후대를 기대하는 가운데 후손들에게 적극적으로 조선 망명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청조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던 조선 정부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들 역시 변방에 숨어 살며 점차 중인 신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선무사를 비롯한 명군의 사당과 조선으로 귀화한 그 후손들의 존재가 尊周大義의 관념 아래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동아시아 정세가 안정기에 접어든 18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특히 조선이 중화문명의 적통을 계승하였다는 朝鮮中華主義의 이데올로기 아래 1704년 대보단이 건립된 뒤, 선무사 등 명군 기념물에 대한 제사는 대보단으로 상징되는 尊周大義의 명분 아래 새롭게 편제되었다. 그리고 참전 명군에 대한 추숭 사업이 전개되는 가운데 조선에 정착한 그 후손들은 皇朝遺民이라는 관념적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선무사 뿐 아니라 남한산성과 강화도에서 순절한 조선인들을 기리는 顯節祠와 忠烈祠 등도 함께 중시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명군의 위상은 존주대의의 이념 아래 점차 상대화 되어 갔다. 영조가 1749년 대보단에 三皇을 병향하며 홍무제의 大造之恩, 만력제의 再造之恩, 숭정제의 東援之恩을 병칭하였음을 보면, 이제 재조지은의 관념은 尊周大義의 일부로서 의미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임란 참전 명군의 위상 역시 호란 이후 조선의 순절자들과 동등한 반열에 위치하게 되었다. 명군의 후손들 중 일부는 선무사와 무열사의 제사를 담당하며 명나라의 후예로서 정체성을 유지해 갔지만, 대보단 수직관을 세습하던 隨龍八姓 등 명나라 사대부의 자손들이 주도하던 귀화한인 사회 안에서도 점차 주변부의 위치로 밀려나게 되었다.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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