靜觀齋 李端相의 생애와 사상 (2) -대명의리론과 상수학을 중심으로-
Lee Dan-sang's life and thoughts (2) : Focusing on Xiangshuxue and the Perception of Succession to Ming's legitim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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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이단상은 17세기 중반 주자학 중심의 조선 사상계에서 象數學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학문을 선도하여, 洛論과 北學으로 이어지는 서인 내 개방적․진보적 학풍의 단초를 이루었던 인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진출한 이래, 주자학에 근거하여 청에 대한 복수를 주장하던 송시열 등 산림들과 뜻을 함께 하였다. 1664년(현종 5) 김만균의 출사 여부를 놓고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지자, 이단상은 대청복수의 당위성을 주장한 송시열의 의견을 지지하며 서필원․김좌명 등 벗들과 절교하고 양주 東岡으로 낙향했다. 뒤이어 1666년(현종 7) 淸使가 파견되어 현종이 무릎 꿇고 사죄한 뒤 罰銀을 물게 된 이른바 벌금사, 그리고 1667년(현종 8) 제주도에 표류한 한인 林寅觀 일행을 청으로 압송한 사건이 일어나자, 대명의리를 저버린 조정의 조처를 비난하며 海槎詩를 남겼다. 동강 은거 이후 이단상은 元會運世의 장구한 흐름 속에서 氣數의 운행에 따라 역사의 흥망성쇠를 바라본 소옹의 상수학을 통해 자신이 직면한 명청교체의 현실을 진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은 맹자의 一治一亂說에 입각하여 청 치하의 현실을 잠시의 혼란기로 규정하고 중화문명의 보전을 통해 治世의 회복을 염원했던 송시열의 중화주의적 세계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Abstract
在以朱子学为中心的17世纪中叶朝鲜王朝思想界,李端相先导了以象数学为标志的新学问, 他被看作为开启了传承为洛论和北学的西人内部的开放性、进步性学风的人物。 可是, 自从走上仕途以来, 他同意宋时烈等根据朱子学主张对清朝复仇的山林的意见。 1664年围绕着金万均的出任官职问题展开争论, 李端相支持宋时烈的对清朝复仇合理性的主张,与徐必远、金佐明等朋友绝交, 退隐到杨洲东岗。 接着, 1666年发生了国王向淸使跪着谢罪并交罚银的事件, 1667年汉人林寅观等人漂流到济州岛, 朝鲜王朝把他们押解到清朝, 李端相写了海槎诗, 批判了丢弃对明朝义理的朝廷的行为。 隐居于东岗之后, 李端相通过在元会运世的长久岁月中沿着气数的运行考察历史兴亡更替的邵雍的象数学, 诊断自身当下的明清交替的现实。 这一点, 与宋时烈根据孟子的一治一乱说把清朝治理的当下现实认定为暂时的混乱期, 通过保存中华文明期许回复治世的中华主义世界观并无二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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