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唐期 大豆 가공기술의 발달과 製粉業
在漢唐期上大豆加工技術的發達和製粉業
0
조회
0
다운로드
11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전국시대에 처음 豆醬이 등장하고, 한대에는 洛陽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醬, 豉가 생산되었으며, 『史記』貨殖列傳에는 2할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상품으로 ‘豉’가 들어 있다. 이것은 이미 戰國 시대부터 대두를 가공하여 副食品을 만들었음을 말해주며, 이때 사용된 공구는 아마 절구와 맷돌이었을 것이다. 이런 도구들과 『齊民要術』의 作醬法, 作豉法을 미루어볼 때, 醬, 豉는 삶거나 불리어 찧거나 맷돌에 갈아 가공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가공 도구와 기술의 발달에 따라 대두는 粒穀을 섭취하는 식품에서 豆粥이나 豆餠을 먹는 단계로 발전했으며, 한 단계 더 나아가 醱酵하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漢唐 시기 가공 도구의 발전과 조리 방식의 변천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곡물이 바로 대두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두는 小麥과 같은 곡물의 製粉을 선도했다고 볼 수 있다. 대두는 『周禮』의 九穀 중의 하나였으며, 『呂氏春秋』의 6種의 주요 곡물에 포함되었고, 한대 鄭玄은 五穀에도 菽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은 대두가 일찍부터 華北의 대표적인 곡물 중 하나였음을 말해준다. 대두는 곡물로서뿐 아니라 일찍부터 後作物의 地力을 보완해주는 시비작물로도 주목되었다. 전국시대 이후 作物交代가 이루어지면서 豆類 작물은 間作, 混種과 套種 또는 夏 작물과 冬 작물을 조합하여 輪作하는 역할도 했다. 한대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2년3작의 경작방식도 豆類 작물이 牽引했다고 볼 수 있다. 대두가 당시 사회경제적으로 기여한 또 다른 점은 극한의 상황에 잘 극복할 수 있게 도와 준 곡물이었다는 것이다. 대두가 災害나 기근 때 오랫동안 救恤 곡물로 사용되었거나, 또 최악의 전투 상황에서 군인들의 양식으로 주로 사용된 것을 보면, 대두가 끈기 있는 단백질 식품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사실은 지배층의 가축 사육에도 대두를 사료로 활용했던 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대두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하는 식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대 洛陽, 長安 같은 대도시가 발달하고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都市風에 알맞은 식품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한대 洛陽 주변에서 醬, 豉 등의 조미료가 다수 출토된 것은 이런 사실을 잘 말해준다. 게다가 바쁜 시장 상인이나 고객들을 위해 빨리 조리하여 신속하게 먹을 수 있는 豆漿이나 豆粥 같은 식음료와 더불어 蒸餠, 국수, 麵餠, 餛飩 등의 麵食도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후한대에 맷돌의 성능이 향상되고 그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이런 가공 식품이 많아졌음을 의미하며, 후한 이후 갑자기 水力을 이용한 碓나 연애가 등장한 것은 그 수요가 더욱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남북조시대 이후 富商大賈나 특권 세력들이 碾磑를 활용한 제분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윤을 도모한 것을 보면 漢唐 시대에는 粉식품과 麵식품이 크게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가공 식품 공업의 측면에서 이후 시대를 위해 견실한 토대를 쌓았다는 점에서 남북조시대는 새롭게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농업 경영을 통해 유력자와 국가가 충돌한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당시 碾磑 경영은 강을 막아 製粉所를 설치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物力과 人力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물의 흐름도 落差가 있어야만 연애 시설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런 조건을 갖춘 지역도 華北의 일부 지역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힘이 있는 특권층이 아니면 연애를 설치하여 운용하는 것은 곤란했다. 게다가 물을 막음으로써 灌漑田에 물을 공급하지 못하게 되자 백성들이 반발하기도 했는데, 그들 뒤에서 重農主義를 표방하는 국가권력과 이들 특권층이 정면으로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충돌은 당대 初․中期에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전의 남북조시대나 唐初期와 이후의 晩唐시기에는 국가가 오히려 碾磑를 제공하거나 지원하기도 하였다. 당 중기에 나타난 兩者간의 충돌 현상은 분명 연애경영과 관련된 일련의 상황, 즉 水環境의 변화, 粉․麵 식품의 증가, 兩稅法의 실시, 중앙권력의 약화 및 異民族 문화의 유입 등과 일정 정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敦煌에서 출토된 『水部式』의 규정에 의하면, 8월 30일-1월 1일까지 農田에 물이 필요하지 않을 때는 碾磑의 作動에 문제없었다는 점을 보면 국가의 연애 경영에 대한 强制도 계절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이러한 문제는 이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Abstract
豆醬最初是在戰國時代出現. 到了漢代, 以洛陽等一些大城市爲中心開始生產醬, 豉等食品. 史記』貨殖列傳中, 出現了豉的描述. 這是從戰國時代開始的大豆加工的副食品的描述. 這個時期所使用的工具是石臼和石磨. 這些工具和『齊民要術』中的作薔法, 作豉法來推斷, 醬, 豉來煮或者膨脹或者用石磨來加工. 隨著這樣的加工道具和技術的發展, 大豆中攝取的粒穀來做豆粥或者豆餅來食用的發展階段. 另外, 另一個發展的階段是發酵階段. 這樣從側面來看漢唐時期加工道具的發展和食用方法的變遷中最合適的穀物就是大豆. 從這方面來看大豆導致了面粉和其他穀物的制粉發展. 大豆是『周禮』的九穀的其中一種. 『呂氏春秋』中六種主要穀物中的一種. 漢代鄭玄把菽歸入到五穀中. 這裏從文獻中提到了大豆從很早開始就是華北代表穀物中的一種. 大豆不單單是作爲一種作物, 還作爲地力的一種補充作物而受到矚目. 戰國時代以後, 作物交替開始實施, 豆類作物作爲夏作物和冬作物開始進行輪作. 經過漢代的發展, 自然而然的, 豆類發展爲2年3耕作的耕作方式. 大豆在當時不但對社會經濟有一定的貢獻, 對克服當時的社會緊急現狀也有一定的貢獻. 大豆在災害和饑荒時期是救災作物. 在最激烈的戰鬥情況下, 大豆作爲軍人的口糧, 能夠提供充分的蛋白質. 因此大豆也能用於家畜的飼料飼養. 對於生活苦難的人, 大豆是他們的食物. 漢代洛陽, 長安等大都市的發展, 都市風的流行, 食品也在開發新的品種. 漢代洛陽周邊醬, 豉等的調味料的出土證實了這一點. 另外, 針對市場和人們能夠快速食用的食品, 也進行了開發. 後漢代時期, 石磨的性能也有了新的發展. 加工食品的需求也開始劇增. 後漢以後, 隨著水力的食用, 效率得到了更發的提高. 另外, 南北朝時期, 富商大賈或者權貴勢力等食用碾磑這樣的工具, 粉狀食品和麵食比漢唐時期發展更迅速. 古代社會, 當權者以及國家在農業經濟方面發生了沖突. 當時碾磑經營在江邊建廠生產粉狀食品, 需要大量的人力和物力. 同時, 需要水流的落差, 所以只能在華北的一部分地區才能施行. 因此這些設施也只能由特權階層才有能力建設. 同時, 因爲水利灌溉的原因, 灌漑田無法得到充分水來灌溉的百姓們也就和特權階層自然而然的發生沖突. 這樣的矛盾沖突到了唐代初中期開始產生. 南北朝時期以及唐代初期以及晚唐時期, 國家提供碾磑或者是資源. 唐代中期出現的這樣的矛盾是最明顯的. 即水環境的變化, 粉, 面食品的增加, 兩稅法的施行, 中央權力的惡化以及異民族文化的流入也產生了 一定的關聯影響. 實際上在敦煌出土的『水部式』的內容來看, 8月30日到1月1日用碾磑的作動並沒有什麼問題. 國家在經濟上采用了強制性的季節制度而不是絕對制度, 關於這些問題的說明將在以後的文章中進行討論.
참고문헌 (36)
- 최덕경, "大豆의 기원과 醬․ 및 豆腐의 보급에 대한 재검토-중국고대 文獻과 그 出土자료를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30), pp.363~427 (2009), 한국역사민속학회
- 西嶋定生, "碾磑の彼方-華北農業における二年三毛作の成立", 中國經濟史硏究 (1966), 東京大出版會
- 王利華, "古代華北水力加工興衰的水環境背景", 中國經濟史硏究 (2005)
- 何双全, "居延漢簡所見漢代農作物小考", 農業考古, pp.252~254 (1986)
- 王毓瑚, "我國自古以來的重要農作物", 農業考古, pp.81~82 (1981)
- 이상은, "戰國秦漢시대 음식물의 材料", 考古歷史學志, 11, pp.95~102 (1996)
- 의 高麗豆 普及과 韓半島의 農作法에 대한 一考察, "동양사학연구", 2002, 3~136, pp.동양사학회
- 최덕경, "大豆栽培의 起源論과 韓半島", 중국사연구, 31(31), pp.65~110 (2004), 중국사학회
- 王利華主, "中國農業史通史(魏晉南北朝卷)", pp.105~ (2009), 中國農業出版社
- 최덕경, "中國古代農業史硏究", pp.311~ (1994), 백산서당
- 陳文華, "中國古代農業考古資料索引", 農業考古 (1987)
- 韋斯, "西域農業考古資料索引", 農業考古 (2004)
- 萬國鼎輯釋, "氾勝之書輯釋", pp.136~, 農業出版社
- 최덕경, "朝鮮時代의 大 ∙ 小豆와 그 가공식품", 대구사학, 72, pp.71~110 (2003), 대구사학회
- 王維民, "中國北方旱地農業技術", pp.238~ (1994), 中國農業出版社
- 梁中效, "試論中國古代糧食加工業的形成", 中國農史 (1992)
- 楊寄林譯注, "太平經今注今譯" (2002), 河北人民出版社
- 韓復智, "漢史論集" (1980), 文史哲出版社
- 大澤正昭, "唐代華北の主穀生産と經營", 史林, 64(2), pp.154~156 (1981)
- 崔德卿, "中國古代地域別農作物分布와 加工", 慶尙史學, 10, pp.141~142 (1994)
- "齊民要術 校釋(제2판)", pp.141~ (1998), 中國農業出版社
- 中國農業博物館, "漢代農業畵像磚石", pp.121~ (1996), 中國農業出版社
- 韋斯, "西域農業考古資料索引(續)", 農業考古, pp.226~230 (2005)
- 李發林, "古代旋轉磨試探", 農業考古 (1986)
- 尤振堯, "泗洪重崗漢代農業畵像石刻硏究", 農業考古, pp.73~ (1984)
- 中國農業博物館, "漢代農業畵像磚石", pp.48~49 (1996), 中國農業出版社
- 김광언, "디딜방아연구", pp.233~236 (2002), 지식산업사
- 劉小平, "水碾與中古水權管理制度述論", 歷史敎學, pp.38~ (2009)
- 繆啓愉校釋, "齊民要術校釋, 卷八作酢法", pp.554~557 (1998), 中國農業出版社
- 李長年, "中國文獻上的大豆栽培和利用, in 農業遺産硏究集刊(第1冊)", pp.93~94 (1958), 中華書局
- 崔德卿, "中國古代農業技術의 발달과 作畝法-農業考古學의 성과를 중심으로-", 釜山史學, 13, pp.65~66 (1987)
- 周藤吉之, "吐魯番出土の佃人文書硏究, in 唐宋社會經濟史硏究" (1965), 東京大出版會
- 李根蟠, "中國農業史", pp.239~240 (1997), 文津出版社
- 劉小平, "唐代寺院的水碾磑經營", 中國農史 (2005)
- 梁忠效, "唐代的碾磑業", 中國史硏究 (1987)
- 王守春, "漢唐長安城的水文環境", 中國歷史地理論叢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