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ERD
논문KCI 등재

<梁普通元年(520)永陽昭王蕭敷墓誌銘>考 - 墓誌文의 譯註를 겸하여 -

A Study on the “Epitaph of Xiao Fu, King Zhao of Yongyang, in the First Year of the Putong Era(AD 520) during the Liang Dynasty”

0

조회

0

다운로드

0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梁普通元年(520)永陽昭王蕭敷墓誌銘>은 梁 武帝의 次兄인 蕭敷의 墓誌로 오늘날 原石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宋代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粧帖(剪裱本)이 유일하다. 이에 본고는 이 剪裱本의 圖版과 淸代 이래로 현재까지의 학자들이 남긴 釋文과 題跋을 종합하고 이를 비교, 검토하여 기존 釋文의 오류를 수정하였다. 본고는 확정된 釋文을 대상으로 한국어 번역과 注解를 진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련 문헌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묘지문에 담겨 있는 南齊, 梁代의 역사적 정황과 제도를 복원하는 한편 古代 墓誌의 정형화 과정에서 이 墓誌의 출현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蕭敷는 梁이 건국되기 전인 南齊 明帝 建武4년(497)년에 사망했다. 따라서 그가 王號를 받은 것은 그의 동생 蕭衍이 황제가 되고 난 이후의 일이다. 즉 그가 永陽昭王에 追封된 것은 502년이다. 그런데 그의 墓誌는 520년에 제작되었다. 墓主의 사망시점과 墓誌의 제작시점이 이렇게 차이가 나게 된 까닭은 520년 蕭敷의 부인인 永陽太妃 王氏의 죽음 때문이다. 蕭敷와 달리 그의 부인 王氏는 太妃로 進封되어 天壽를 누리다가 520년에 사망했고, 당시의 장례제도에 따라 그녀의 시신은 남편의 무덤에 合葬되었다. 이를 위해 蕭敷의 무덤이 잠시 개방되었고, 이때 당시 황제인 武帝는 형을 추억하면서 墓誌의 제작을 명령했다. 武帝는 당대 최고의 文士이자 고위 관료인 尙書右僕射 徐勉에게 墓誌銘의 작성을 특별히 勅書로서 명했다. 이 때문에 이 墓誌를 필자는 ‘奉勅撰墓誌’ 규정했다. 이를 통해 武帝가 이 墓誌의 제작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蕭敷墓誌> 이전의 남조 墓誌들은 정형화 된 唐代의 墓誌들에 비해 그 구성과 형식이 불완전하고, 독창적이고 새로운 시도들도 종종 확인된다. 반면 <蕭敷墓誌>는 序, 誌, 銘의 엄격한 분리, 標題 하의 撰者의 姓名 표기 방식 등이 모두 唐代의 정형화 된 墓誌와 일치한다. 따라서 이를 통해 늦어도 <蕭敷墓誌>가 등장한 普通元年(520)부터 남조에서는 묘지명이 정형화의 단계에 돌입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蕭敷墓誌>에 기술된 역사적 사실이 갖는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正史에 疏略한 그의 官歷은 墓誌에 상세한데 이를 통해 劉宋에서 南齊를 거치면서 東宮 소속의 관리인 太子洗馬의 위상이 提高되고 이것이 후에 梁 武帝의 18班制에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梁書』 「武帝紀」에는 무제가 詔書를 내려 蕭敷를 왕으로 追封한 일만 기록되어 있고 그에게 정확히 얼마의 食邑을 내렸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蕭敷墓誌>에 인용된 追封詔書에는 武帝가 그에게 食邑 二千戶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고 이는 당시 생존하여 왕이 된 무제의 다른 동생들, 즉 蕭敷의 형제들과 같은 수치다. <蕭敷墓誌>를 통해 당시 親王에게 하사된 식읍은 당사자의 생존여부, 서열의 고하와 관계없이 이천호로 동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Abstract

《梁普通元年(520)永阳昭王萧敷墓志铭》作为梁武帝的次兄萧敷的墓志,现今并未以原石流传下来。目前唯一剩下的只有被推断为制作于宋代的剪裱本。对此,本稿综合剪裱本的图版与淸代以来至今的学者们留下的释文和题跋就此进行比较和探讨来纠正了此前释文的失误。本稿并未停留在对已确定的释文进行韩文翻译和注解上,而通过与相关文献资料的比较对墓志文中所蕴含的南齐、梁代的历史现状和制度进行复原,同时要确认古代墓志的定型化过程中该墓志出现所具有的历史性意义。萧敷死于梁建国前的南齐明帝建武4年(497)。因而,其获得王号是在其弟萧衍登上皇位以后。也就是或其被追封为永阳昭王是自502年。但萧敷的墓志则制作于520年。墓主死亡的时间点与墓志制作时间点出现这样差异的缘由是520年萧敷的夫人永阳太妃王氏的死亡。萧敷的夫人王氏与其不同,在其被进封为太妃后享尽天年在520年死亡。根据当时的葬礼制度,王氏的尸身与其丈夫一起被合葬在其丈夫墓地中。为此,萧敷的坟墓暂时被开放,而这时当时的黄帝武帝追忆其兄长并做出制作墓志的指令。武帝将当地最高文士暨高位官僚尙書右仆射徐勉特别任命为敕书并令其制作墓志铭。因而笔者将该墓志规定为“奉勅撰墓志”。通过这一情况可知武帝对墓志的制作的关注度有多高。从《萧敷墓志》以前的南朝墓志可发现其与定型化的唐代墓志相比,其结构与形式并不完整,且有独创性的新的尝试。而与此相反,《萧敷墓志》的序、铭、志严格的分离,标题下的撰写者姓名标注方式等均与唐代定型化的墓志一致。因此,通过这一过程最晚也应是自《萧敷墓志》登场的普通元年(520)起,南朝开始进入墓志铭定型化阶段。另外,《萧敷墓志》中记述的历史事实具有的史料价值相当高。正史中疏忽的起官历在墓志上的描述较为详细,而通过这一描述经过刘宋到南齐时期,属于东宫的管理人太子洗马的地位得到了提高,而这一事实可通过此后梁武帝的18班制中的体现得以确认。此外,《梁书》《武帝纪》只记述了武帝下诏书将萧敷追封为王的事实,但并未准确描述赐予其多少食邑。但《萧敷墓志》中引用的 追封诏书中记述着武帝赐予其食邑二千戶,这与当时在世的成为王的武帝其他兄弟,也就是萧敷的兄弟们是同样的。通过《萧敷墓志》可确认当时赐予亲王的食邑是与当事人生存与否、等级高低无关地一致赐予二千户。

참고문헌 (40)

  1. "漢書", ~
  2. "宋書", ~
  3. "南齊書", ~
  4. "梁書", ~
  5. "南史", ~
  6. "隋書", ~
  7. 宋 陳思, "石刻史料新編" (1977), 新文豊出版公司
  8. 昭明太子, "文選" (1997), 上海古籍出版社
  9. 歐陽詢, "藝文類聚" (2007), 上海古籍出版社
  10. 孔穎達, "毛詩正義" (1999), 北京大學出版社
  11. 李林甫, "唐六典" (2005), 中華書局
  12. 唐 杜佑, "通典" (2003), 中華書局
  13. 宋 李昉, "太平御覽" (2000), 河北敎育出版社
  14. 司馬光, "資治通鑑" (1956), 中華書局
  15. 張敦頤, "六朝事跡編類" (2012), 中華書局
  16. 淸 趙翼, "廿二史箚記" (2007), 中華書局
  17. 嚴可均, "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 (1991), 中華書局
  18. 方履籛, "石刻史料新編" (1977), 新文豊出版公司
  19. 莫友之, "石刻史料新編" (2006), 新文豊出版公司
  20. 王聘珍, "大戴禮記解詁" (1998), 中華書局
  21. 徐元誥, "國語集解" (2006), 中華書局
  22. "石刻史料新編" (1977), 新文豊出版公司
  23. 어석천추(語石千秋)」 -중국석각탁본전-, "대한민국 충북대학교박물관", 충북대학교박물관, ~ (2023)
  24. "梁 蕭敷·王氏墓誌銘", 書法叢刊, (5) (1983)
  25. 周紹良, "唐代墓誌彙編" (1992), 上海古籍
  26. 中國碑刻全集編纂委員會, "中國碑刻全集 4: 南北朝隋唐" (2010), 人民美術出版社
  27. 趙超, "漢魏南北朝墓誌彙編" (2008), 天津古籍
  28. 毛遠明, "漢魏六朝碑刻校注" (2009), 線裝書局
  29. 故宮博物院, "南京" (2014), 文物出版社
  30. 宮崎市定, "구품관인법의 연구" (2002), 소나무
  31. 朱希祖, "民國叢書" (1992), 上海書店
  32. 羅宗眞, "探索歷史的眞相 : 江蘇地區考古" (2002), 江蘇古籍
  33. 徐湖平, "古代銘刻書法" (2003), 天津人民美術出版社
  34. 邵磊, "冶山存稿" (2004), 鳳凰出版社
  35. 梁鎭誠, "梁代 奉勅撰墓誌를 통해 본 墓誌銘의 定型化", 中國史硏究, (105) (2016)
  36. 梁鎭誠, "<梁天監元年(502)桂陽王蕭融墓誌>의 종합적 검토", 史林, (78) (2021)
  37. 金琦, "南京甘家巷和童家山六朝墓", 考古, (6) (1963)
  38. 羅宗眞, "梁蕭敷墓誌的有關問題", 考古, (1) (1986)
  39. 莊天明, "金石不朽 書道千秋——南京博物院藏古代銘刻簡介", 中國書畫, (5) (2004)
  40. 吳修安, "梁蕭敷及王氏墓誌銘流傳考", 早期中國史硏究, 5(1) (2013)

관련 논문AI추천

이 간행물의 다른 논문 (7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