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漢城强襲'의 再認識
Reconsidering the Hanseong Attack by Kogur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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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5C 東Asia 國際秩序는 高句麗․北魏․南朝․柔然․土谷渾라는 5大强國에 의한 勢力均衡體制가 성립되어 상대적 안정을 누리면서, 특히 고구려가 casting vote를 행사하고 있었다. A.D. 5C 이후 百濟는 이 국제체제의 운영에 있어 5 대 열강의 次下位 수준의 單位國家로서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427년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南下-南進政策 일변도의 국세팽창정책과는 무관하며, 이미 帝國化된 국력을 바탕으로 왕권의 專制化를 강행하고자 하는 의도 하에서 수행된 것이다. 백제 蓋鹵王代의 國政 파탄은 무엇보다도 軍事貴族制 하에서 그의 武勳이 그의 意慾을 뒷받침 해주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472년 북위에 대한 개로왕의 表文外交는 東北Asia에서의 고구려 覇權을 인정함으로써 東Asia世界에서의 궁극적인 자기 패권을 鞏固化시키려는 북위측의 世界政策에 부딪쳐 무산될 수 밖에 없었다. 개로왕 대 당시 麗濟前線은 대체로 漢江-臨津江線을 중심으로 형성․전개되어 있었다. 이렇게 짧아진 戰場縱深은 백제가 고구려의 突發的 軍事行動으로부터 자기 왕도를 지키기 위한 실효적 군사대응 조치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475년 漢城强襲 당시 고구려군의 進攻路는 개성 → 長端을 → 瓠蘆河․七重河 → 積城 → 楊洲 → 峨嵯山 route 였다.
Abstract
In the 5th century, Koguryo kept the casting vote in the balance of power international system of the North Eastern Asia After the 5th century, Baekjei remained as the least powerful nation in the 5 nations -competing international system. The capital-moving to Pyongyang by King Jangsoo was carried out in 427 to centralize the national political power. The King Gaero could not menage his government because the military preparedness was not enough to realise his dream. Furthermore the length of battle field became extremely shortened, so King Gaero could not effectively responsed to the Koguryo's surprising military attac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