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頭山(長白山)和 中.韓(朝鮮) 國境線 問題
白頭山(長白山)和中.韓(朝鮮)國境線 問題 (The Borderline between Korea and China along with Paekdusan)
0
조회
0
다운로드
4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白頭山은 우리 韓民族에게는 영원한 고향과 같은 민족의 發祥地 이며 국가의 始原으로, 생명력을 지닌 민족의 聖山으로 崇仰 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조선 이후 夫餘, 高句麗, 渤海 등의 나라들이백두산을 근거로 하여 발전의 동력을 삼았고 민족 기상의 發揚의 근본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한편 이 백두산 주변 을 생활 근거지로 삼았던 肅愼 ,靺鞨, 女眞, 滿洲族 등도 그네들의 發祥地 내지 根據地라 여겨왔고, 심지어 신격화 전설화 등 그들의 나름대로 崇仰 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백두산은 풍수지리상 지세를 사람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氣가 뭉쳐진 머리로 하여 韓半島가 형성되고 그 氣의 흐름이 낭림산맥-태백산맥-소백산맥- 노령산맥으로 이어져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뼈 의 역할을 하는 “白頭大幹” 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백두산은 기원926년에 契丹族에 의하여 발해가 멸망됨으로서 우리민족의 영역에서 벗어나 우리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 후로 부터는 故土回復의 전진 기지, 혹은 최전방 에 보이는 탈환의 고지 진지로 되어, 오랜 세월 우리민족의 마음속에만 간직된 잃어버린 터전에서, 되찾아야 될 옛 고향 땅이 되고 말았다. 한편 만주족의 淸도 이곳을 민족의 發祥地로 , 국가번영의 터전으로 하여 벼슬을 내리고 이름 마져 泰山,長白山이라 하면서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영원토록 번영의 길로 갈수 있다고 여겨 왔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백두산은 우리 민족뿐 만 아니라 북방에서 明滅하던 東夷 諸國의 정신적 고향 땅으로 활동의 주 무대가 되어, 이곳에 대한 국경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이후 이 지역을 자신들의 근거지라 하여 타 민족의 접근조차 금하는 封禁政策을 실시하여 200여 년 간 어느 누구도 출입을 하지 못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7세기후반 18세기 초 조선 사람들이 압록강, 두만강 을 넘어와 백두산 인근 지역과 두만강 북안 지역을 개척하기 시작 하자 청은 그 당시 국경도 확정 되지 못했던 백두산을 그들의 영역으로 귀속 시키려 했다. 1712년 白頭山 定界碑를 세워 백두산에 관한 언급 없이 천지를 포함하는 넓은 산지를 자기들의 영토로 삼았고, 심지어 土門江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국경분쟁의 산물인 間島問題가 야기되었다. 그 이후 日帝의 强占으로 우리의 국권이 상실된 시기에 독립운동의 據點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으로 국권이 회복된 후에도 우리민족의 분단과 조선(북한)과 중국이 1962년에 조,중 변계조약에 의하여 백두산이 반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두산의 역사와 명칭문제를 보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이 중국의 전국시대인 BC475년~AD 221년 사이에 쓰여진 지리지(山海經) 이다. 여기에 不咸山으로 등장한 이래 漢代 單單大嶺으로, 남북조 시대 北魏에서는 개마대산, 당의 시대는 太白山이라 불렸고 , 고구려 시대 白山 여진족의 금나라 시대인 1115년경부터 장백산이라 불렸다.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삼국유사>에 처음 그 기록이 나오는데 신라31대왕인 신문왕(681-692)시기에 白頭山이란 기록이 처음등장 했고 , 그 후 고려시대와 조선조 4대왕 세종시기에 압록강 두만강을 회복 하면서 백두산을 다시 거론 했다. 근세에 와서는 중국의 청조 시기인 1712년 백두산 정계비와 관련된 문서와 중화민국, 만주국, 중화인민공화국 초창기부터 1980년대 초까지 白頭山으로 표기되었고, 특히 1962년 조,중 변계조약 및 1964년의 조,중변계조약 의정서에서도 백두산으로 표기되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1983년8월 덩샤오핑(鄧小平) 최고 지도자가 백두산을 등정 하고난 후 長白山이란 명칭과 天池라는 휘호를 쓰고 찬사를 남긴 이후 장백산으로 호칭 하게 되었고 공식문서에서도 장백산으로 표기되면서 실질적으로 백두산을 각각 반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우리와 중국에서는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고, 심지어 중국은 이 백두산을 세계의 명산으로 유네스코 자연 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서둘고 있다. 이 백두산의 관할문제를 보면 백두산의 주봉을 우리는 병사봉 이라 하고 그 높이를 2,744m 로 알고 있으며 조선(북한) 에서는 주봉을 將軍峰이라하고 높이를 2,750m, 심지어 중국에서는 주봉을 白頭峰, 그높이를 2,749.6m 이라고 파악하고 있으며 이웃일본은 우리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이산은 해발 2,155m 에는 9.15평방키로 미터에 이르는 天池가 있다. 이 천지는 조선(북한) 이 51%인 4.67평방키로 미터를, 중국이 49%인 4.48평키로 미터를 각각 소유하고 있다. 이 천지 주변에는 천지를 둘려 싸고 있는 해발 2,500m 이상 봉우리가 22개가 파악되고 있는데 그중 최고봉 병사봉(백두봉)을 비릇한 6개 가 조선(북한) 영역이고 중국측 최고봉인 백운봉을 비릇한 11개 가 중국의 영역이며 나머지 5개의 봉우리가 국경선 상에 있어 공동 영역으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 중국은 이 백두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장백산이란 명칭으로 대대적인 개발과 아울러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으면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 동안 우리가 거론한 “소위 백두산 공정” 등의 시비를 비껴 가기 위한 대응책으로 장백산의 최고봉을 백운봉(중국영역11개중 최고봉)(2,691m)이라고 하면서 백두산과 마치 별개의 산인양 명칭에 거리를 두고 있다. 특히 요즘에 와서 백두산 대폭발의 임박설 등으로 인하여 더욱 관심이 고조 되고 있는 백두산 문제는 우리 의 관심이 아닐 수 없고 영토 문제 등 어려운 난제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Abstract
白头山于我等韩民族而言犹如永远的故乡,以其民族之发祥地、国家之起源、富于生命力的民族之圣山而备受崇拜与景仰。从历史的观点来看,古朝鲜以后,先后有扶余、高句丽、渤海等国将白头山视作发展的原动力与发扬民族气节的根本源泉。 曾以白头山周边地区为生存根据地的肃慎、靺鞨、女真、满族等也将其视为他们的发祥地乃至根据地,甚至将白头山进行神化,抑或传说化。由此可见,他们也曾崇拜与景仰过白头山亦是无可争辩的事实。白头山因其风水地理上的地势独特,常被比作人体来理解。白头山是凝聚气场的头部,由此而延伸形成了韩半岛。其气场的流动走向为狼林山脉→太白山脉→小白山脉→芦岭山脉相连,传承着白头山的气场。因此被称为具有脊梁作用的“白头大干”。然而,白头山于公元926年,随着被契丹族所灭的渤海国的消失,白头山从此脱离我们的民族所辖领域而渐行渐远。正因如此,白头山成为了我们韩半岛民族心中的隐痛。然而,这也只是在悠久的历史长河中作为曾经的故土留在了我们的民族心里。曾几何时,满清政府也曾将白头山视作满族的发祥地,国家繁荣的根基而派遣过戍边大吏。甚至还称其为泰山、长白山。认为拥有长白山的精、气、神就能永远繁荣而不衰。这样的历史也是曾经的事实。白头山,不仅是我们的民族,在北方,时值明朝灭亡时,作为东夷诸国精神上的故乡,成了东夷诸国活动的主要舞台。于是便产生了这一地区的国界问题。十七世纪,清政府把首都移至北京以后,认为这一地区是他们的根据地,实施了不许其它民族接近的“封禁政策”。200多年来,不许任何人进入白头山。但是,到了十七世纪后期至十八世纪初,随着朝鲜人跨过鸭绿江和图们江,移居白头山附近区域,开垦了图们江北岸。于是,清政府欲将还未确定国界的白头山划归自己的领地,1712年立了白头山定界碑。还未言及白头山,就把白头山包括天池在内的大片山地划归自己的领土。以至于因针对图们江的解释存有异议,造成了国境争议,产生了间岛问题。后来,由于日本帝国主义的强行占领,我国丧失国家主权时期,以白头山为独立运动的据点。随着第二次世界大战的结束,即使我国的主权得到了恢复,但是由于韩半岛民族的分裂状态,朝鲜(北韩)和中国于1962年签订了朝、中边界条约,致使白头山被划为如今的一分为二。从白头山的历史以及名称演变上来看,最初记载的文献是中国的战国时期,即BC475年~AD221年间撰写的地理志《山海经》。《山海经》里把白头山记载为“不咸山”、汉代为“单单大岭”、南北朝时期的北魏为“盖马大山”、唐代为“太白山”、高句丽时代为“白山”、女真族的金国时代,即1115年前后才开始称为“长白山”。在我国文献《三国遗事》中首次出现了相关记载。新罗第三十一代王,即神文王(681~692)时期,第一次以“白头山”名称记载下来。此后,历经高丽王朝和朝鲜四代王世宗时期恢复鸭绿江及豆满江以来,又提到了白头山。到了近代,自中国的清朝时期1712年立下“白头山定界碑”以来,中华民国、满洲国、中华人民共和国初期直至1980年代初,在有关文书上依然记载为“白头山”。尤其是在1962年,朝中边界条约以及1964年的《朝中边界议定书》上也都以“白头山”记载。1983年8月邓小平攀登长白山以后,题写“长白山、天池”以来,中国才开始使用“长白山”名称,公文也正式采用了该名称。由此白头山实质上被各分一半了。关于白头山的主峰,我们称之为兵士峰,其高度为2,744米;朝鲜称其为将军峰,其高度为2,750米。然而在中国则称其为白头峰,其高度为2749.6米。而日本则对此持有与我国相似的见解。白头山顶上存在着海拔为2,155米,面积为9.15平方公里的天池。该天池,朝鲜占51%,达4.67平方公里;中国占49%,达4.48平方公里。围绕天池周围耸立着海拔2,500米以上的22座山峰。其中,最高峰兵士峰(白头峰)为代表的6座山峰属于朝鲜领土;中国一侧的最高峰白云峰为主的11座山峰为中国领土。其余5座山峰处于国界上,属于共同管辖。眼下,中国人对白头山很关心,并以长白山的名义进行大量开发,也不惜大笔投资热衷于对外广告。中国方面为了应对我们曾经关注过的所谓“白头山工程”,将白头山的最高峰称为白云峰(属于中国领土的11座山峰中的最高峰,2,691米),似乎与白头山毫无关系似的,名称上保持了一定的距离。特别是到了最近,随着白头山火山大爆发的临近说,对白头山问题的关注达到了高潮。这无疑也是我们的重大关切。有关领土方面的问题更显错综复杂。
참고문헌 (14)
- 楊昭全, "中朝邊界史" (1993), 吉林文史出版社
- 楊昭全, "中朝邊界硏究文集" (1989), 吉林省社會科學院
- 蓧田治策, "간도는 조선 땅이다(백두산정계비와 국경)" (2005), 지선당
- 陸洛現, "白頭山定界碑와 間島領有權" (2000), 백산자료원
- 張碧波, "中國東北疆域硏究" (2006), 黑龍江人民出版社
- 延邊海外問題硏究所, "交流와 思考", 延邊人民出版社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長白山志" (2006), 吉林人民出版社
- 金長好, "韓國名山記" (1993), 平和出版社
- 金漢山, "長白山休火山" (1998), 답사기
- 심혜숙, "백두산" (2007), 대원사
- 양태진, "조약으로 본 우리 땅 이야기" (2007), 예나루
- 양태진, "우리 나라 영토 이야기" (2007), 예나루
- 長白縣志編纂委員會, "長白朝鮮族自治縣志" (2001), 中華書局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安圖縣文物志" (19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