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8⋅649년 신라의 對百濟戰 승리와 그 의미
The Victory of the Silla against the Baekje in 648⋅649 Battles and their Meaning
0
조회
0
다운로드
28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이 글은 신라와 백제의 전쟁사 연구에서 간과되어 온 648년과 649년의 전쟁을 검토한 것이다. 신라가 대승을 거둔 두 해의 전쟁 과정을 재구성하고 그것이 신라사상에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7세기 전반기 신라와 백제 사이에 발생했던 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은 백제의 선제공격과 이에 대한 신라의 방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국력과 군사력에서 백제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642년의 대야성 전투에서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전쟁을 통해 백제는 신라의 서쪽 40여성과 하주의 주치인 대야성을 공취하여 낙동강 이서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반면 신라에는 패전의 후폭풍이 거세게 몰아쳤으며,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했던 김춘추와 김유신은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각각 외교활동과 군사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둘째, 648년에 이르러 두 사람의 활동은 가시적인 성과를 얻게 되었다. 먼저 김춘추가 당 태종으로부터 병력 20만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김유신은 대야성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옥문곡 전투에서 장군 의직이 이끈 백제군을 대파하고 대야성과 낙동강 이서지역을 탈환하였다. 나아가 백제로부터 김품석 부처의 유골을 반환받아 대야성 패전이 남긴 마지막 수치를 씻어냈다. 이어서 백제의 경내로 침입하여 악성 들 12성을 함락하고 2만여 명을 목 베고 9천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셋째, 649년의 전쟁 양상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백제의 선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은 도살성 전투에서 10명의 장군과 9천에 가까운 백제군을 목 베었으며 말과 갑옷 등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넷째, 648⋅649년의 전쟁은 신라가 기획하여 백제를 선공⋅격파했고, 백제 영역 안으로 침입하여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다수의 인명을 살상했으며, 백제군의 지휘부를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종래의 신라-백제 전쟁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로부터 양국의 전쟁은 신라 우위로 귀결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다섯째, 두 해의 대백제 전쟁이 신라사에서 가진 역사적 의미도 적지 않았다. 국내적으로는 대야성의 패전을 설욕하여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치적 입지가 더욱 높아졌다. 또 두 번에 걸친 대승으로 신라의 조야는 백제보다 국력과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이를 당에 알려 나당군사동맹을 실제로 가동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편 백제 내부에서는 非勢를 예감한 일부 신료들이 친신라화하여 고급 정보를 신라로 유출하는 등 백제 멸망 전략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은 본격적인 “신라의 삼국통일(통합)전쟁”이 시작되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Abstract
This thesis is considered the subject of the war has been ignored between Silla and Baekje in 648⋅649. The conclusions are following First, it can be summarized that the war between Silla and Baekje was Baekje’s pre-emptive attack and Silla’s defense in the early 7th century. In other words, national power and military power of Baekje were stronger than those of Silla. It is obvious that the battle of Dae-ya castle at 642. Baekje took the control of west of Nakdong river and Silla through the battle. On the other hand, Kim chun-choo and Kim yu-sin worked on enthusiastically diplomatic activity and military activity in order to atereffect of losing the battle. Second, those activities were achived excellent results. Kim chun-choo was promised to 200,000 troops by Tang. In addion, Kim yu-sin recaptured Dae-ya castle and west of Nakdong-river through defeating the Baekje, and received remains of Kim pung-suk Third, the war in 649 was equalized. Although the war was started Baekje’s attack, Silla got great victory that Kim yu-sin killed 10 generals and 9,000 arms. Fourth, Silla planed the war in 648, 649 and defeated Baekje. And Silla invaded Baekje’s territory then took several castles, annihilated Baekje’s command. The war between Silla and Baekje was totally different from other wars. From that time, Silla was more competitive than Baekje. Fifth, Silla’s victory in two years meant a lot to Silla’s history. The reputation of Kim chun-choo and Kim yu-sin was famous as well as people gained confidence that Silla’s military was stronger than Baekje. Silla announced the victory to Tang dynasty and activated military allince with Tang dynasty. Meanwhile Baeekje’s retainers divulged secrets to Silla accelarated the fall of Baekje. Therefore, the battles in 648⋅649 can be the beginning of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by Silla.
참고문헌 (43)
- "三國史記", ~
- "三國遺事", ~
- "舊唐書", ~
- "新唐書", ~
- "資治通鑑", ~
- "冊府元龜", ~
- 權悳永, "古代韓中外交史-遣唐使硏究-" (1997), 一潮閣
- 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1988), 一潮閣
- 노중국,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 (2012), 지식산업사
-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2009),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 문안식, "백제의 흥망과 전쟁" (2006), 혜안
- 李文基, "新羅兵制史硏究" (1997), 一潮閣
- 이문기, "신라 하대 정치와 사회 연구" (2015), 학연문화사
- 李昊榮, "新羅三國統合과 麗⋅濟敗亡原因硏究" (1997), 書景文化社
- 임용한, "한국고대전쟁사 2" (2012), 혜안
- 李成市,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國家" (1998), 岩波書店
- 김창석,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百濟ㆍ新羅의 전쟁과 大耶城", 신라문화, 34(34), pp.77~104 (2009), 신라문화연구소
- 金泰植, "百濟의 中央과 地方" (1997), 충남대 백제연구소
- 김병남, "百濟 武王代의 阿莫城 전투 과정과 그 결과", 역사학연구, (22), pp.101~124 (2004), 호남사학회
- 金榮官, "羅唐聯合軍의 百濟侵攻戰略과 百濟의 防禦戰略", STRATEGY 21, 2(2) (1999), 한국해양전략연구소
- 金瑛洙, "古代 諜者考", 軍史, 27 (1993)
- 김주성, "百濟 武王의 大耶城 進出 企圖", 백제연구, (49), pp.41~60 (2009), 백제연구소
- 金周成, "百濟 사비時代 政治史 硏究", 박사, 사학, pp.1990
- 南廷昊, "사비 후기 백제의 정치세력과 정국운영의 변화", 박사, pp.2016
- 남정호, "義慈王 後期 支配層의 分裂과 百濟의 滅亡", 百濟學報, 4 (2010)
- 노중국, "7世紀 新羅와 百濟와의 關係", 제4회 신라학국제학술회의 논문집 (2011), 경주시⋅신라문화유산연구원
- 盧泰敦, "淵蓋蘇文과 金春秋", 韓國史市民講座, 5 (1989)
- 문안식, "의자왕 전반기의 신라 공격과 영토확장", 慶州史學, 23 (2003)
- 閔德植, "高句麗의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 (1983)
- 朴珉慶, "武王⋅義慈王代 政局運營의 硏究", 韓國古代史硏究, 20 (2000)
- 박승홍,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지명학, 17, pp.141~178 (2011), 한국지명학회[DOI]
- 성주탁, "조천성의 위치에 대하여", 百濟硏究, 4 (1973)
- 이도학, "특집논문 : 백제 무왕과 그의시대 ; 백제(百濟) 무왕(武王)의 계보(系譜)와 집권(執權) 기반(基盤)", 백제문화, (34), pp.69~85 (2005), 백제문화연구소
- 李文基, "泗沘時代 百濟의 軍事組織과 그 運用", 百濟硏究, 28 (1998)
- 전덕재, "椵岑城의 位置와 그 戰鬪의 역사적 성격", 역사와경계, (87), pp.1~36 (2013), 부산경남사학회
- 전덕재,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신라문화, 34(34), pp.31~76 (2009), 신라문화연구소
- 全榮來, "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85)
- 정동준, "7세기 전반 백제의 대외정책", 역사와 현실, (46), pp.37~72 (2002), 한국역사연구회
- 鄭永鎬, "百濟助川城考", 百濟硏究, 3 (1972)
- 정운용, "사비도읍기의 백제" (2007),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 朱甫暾, "金春秋의 外交活動과 新羅內政", 韓國學論集, 20 (1993)
- 朱甫暾, "文館詞林에 보이는 韓國古代史 관련 外交文書", 慶北史學, 15 (1992)
- 三池賢一, "古代の朝鮮" (1982), 學生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