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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시기 중국 관영언론의 인식과 대응 - 《중앙일보》를 중심으로 -

Perceptions and Reactions of China’s Government Running Medias during the period of Manchurian Incident ―Focused on Zhongyangrib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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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이 글은 중일전쟁의 서막이라 할 수 있는 만주사변시기 중국 관영언론의 시국인식과 대응양상을 규명하기 위해 훈정시기 국민당 중앙의 당보였던 《중앙일보》의 보도기사와 사론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북벌에 성공한 국민당은 훈정을 실현하기 위해 본래 좌파 성향이던 《중앙일보》를 재정비하여 중앙당보로서 기능을 강화하였다. 이 신문은 1931년 초까지 직영언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해 9월 18일 일제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당보로서 대일방침을 선전, 확산시켰고, 항일전략을 생산, 전파하는데 주도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일보》는 양적, 질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중일전쟁시기 직영언론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만주사변 초기에 《중앙일보》는 대내적으로 전 국민의 단결과 죽음을 각오한 항일의지를 호소하며 격렬한 어휘로 일제 침략을 비판했다. 동시에 이 신문은 학생, 청년들의 구국운동을 억압하며 국민당의 지도, 관리를 강조한 ‘질서 있는 항전준비’를 주장하는 이중 태도를 취하였다. 이것은 난징정부의 시국대책을 전제로 항일여론에 호응할 수밖에 없던 관영언론의 현실적 한계였다. 대외적으로는 국제연맹의 간섭에 의한 일본군의 철수를 압박하는 전략이었으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난징정부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역량과 가시적 노력이 부족하였다. 다만 대일 경제단교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국민의 항전열기를 분출시키는 돌파구가 되었다. 만주사변시기 《중앙일보》의 언론보도는 중앙 당보란 위상 때문에 부저항노선을 벗어날 수 없어 실제 대책이 부재한 구호성 논설에 그쳤다. 따라서 항일여론의 형성과정에서 관영언론의 영향력은 미약했고, 오히려 여론을 왜곡, 호도한다는 비판과 함께 국민들로부터 신문사가 공격을 당하였다. 《중앙일보》는 직영신문이란 제한된 틀 안에서 일치단결과 질서 있는 항전준비, 국제연맹의 외교적 간섭, 대일경제단교와 국민의 정신무장 등 비폭력적 방법에 의한 장기항전을 지속적으로 제기하였다. 이것은 장제스의 부저항노선에 따른 언론보도라고 평가 절하할 수 있지만 정부의 대일정책에 관한 국민적 비판과 저항을 완화시키고, 즉각 항전을 요구한 민영언론의 압박을 해소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만주사변 이후 국민당의 부저항노선은 난징정부의 정통성에 상처를 입혔지만 이후 장기저항은 장제스 중심의 대일항전이란 틀을 만들어냈다. 이 논리는 《중앙일보》의 주도로 관영신문은 물론 중국 전체의 항일전쟁 전략으로 굳어져 장제스의 지도력을 인정하게 되는 기저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1937년 7․7사변으로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치달으면서 국내 각 세력의 통합에 의한 항일전쟁을 수행하는 단초가 되었다.

Abstract

This paper is of the comprehensive examination on the articles and the editorials of Zhongyangribao, the party newspaper of Guomindang(People's party) in the Political Tutelage period, in order to clarify the situational recognition and the reactional aspects of China’s government-running media during the period of the Manchurian Incident which was the prelusion of the Sino-Japanese War. With the success of the Northern Expedition, in order to realize the Political Tutelage, Guomindang reformed Zhongyangribao, which was originally the inclination of left, and strengthen the function as its central party newspaper. By the early 1931, this newspaper could not overcome its limit of a party controled media; but the Japanese empire’s invasion of Manchuria provided a turning points to Zhongyangribao as a party newspaper. It started to propagate and expand anti-Japanese policies and dominantly produced and spreaded anti-Japanese strategies. Throughout this process Zhongyangribao rapidly grew both in quantity and in quality, and took up the core of the directly-controlled media. In the early phase of the Manchurian Incident, Zhongyangribao domestically appealed for nationwide solidarity, prepared death for anti-Japanese volition, and criticized the invasion of Japanese empire in fierce wordings. At the same time the newspaper took the bilateral position suppressing the national independent movement of students and youths and asserting the ‘Resistance in Order’ under Guomindang’s supervision and administration. This bilaterality showed the fanciless limit of a government-running media which had to correspond to the anti-Japanese public opinion only within Nanjing government’s resolutions. Internationally, Zhongyangribao took the strategy of squeezing Japanese army’s retreat by the interference of the League of Nations; but there were not enough political·military·diplomatic abilities and efforts of Nanjing government. Yet, the economic severance against Japan turned into a notable success and became a breakthrough for exploding the nation’s resisting energy. Since Zhongyangribao was the central party newspaper, its reports could not diverge from the nonresistant pace and its editorials were lack of practical resolution. Therefore, the influence of government-running media in the process of forming anti-Japanese public opinion was very weak. Rather, the newspaper company got attacked by the public with the critique of distorting and misleading public opinions. Zhongyangribao within the limit as a directly-controlled newspaper asserted the nonviolent long-term resistance, such as the nationwide solidarity, the resistance in order, the diplomatic interference of the League of Nations, the economic severance against Japan, and the national spiritual armament. Although it might be devaluated as a passive action under nonresistance pace, it took an important role for relieving the national critique and resistance against Guomindang’s Japan policies, and for resolving the private medias’ pressure asserting the immediate fighting. Although Guomindang’s nonresistance pace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hurted Nanjing government’s legitimacy, Japanese empire’s constant aggression formulated the format of the anti-Japanese war with Chiang Kai-shek in the core. Such a logic of Zhongyangribao became the strategy for anti-Japanese war not only of government-running media but also of China as a whole, and acted as the foundation for Chiang Kai-shek’s leadership. And then, as the Marco Polo Bridge Incident of 1937 enlarged the Sino-Japanese war into full-scale, the same logic became a key for the solidarity of all domestic groups to fight against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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