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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 초기 경상좌도 일본군의 동향과 영천성 전투

The Activities of Japanese Armed forces in Kyeongsang Province in the Early Period of Imjin War : Battle of Yeongcheon Fort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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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임진전쟁 시기 의병의 활동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의병이 맞서 싸웠던 일본군에 대한 파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에서는 의병의 상대였던 일본군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거나 적절하지 않은 근거를 토대로 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서술한 경우가 있었다. 교전상대 없이 이루어진 전투는 없다. 또한 ‘적’과 ‘적’이 남긴 사료 대한 분석 없이 조선 자료만으로는 전투를 온전히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일본 측의 사료를 이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임진전쟁 당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대 배치 명령서에서 지시된 편성체제 하에서 움직였다. 명 침략이라는 히데요시의 큰 전략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각 부대는 각각의 장수와 그의 가신, 그리고 가신이 거느린 개인 부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스스로 병력과 군량을 준비해야만 했다. 군량을 약탈할 것인지, 영지에서 운송할 것인지, 대여할 것인지는 부대를 이끄는 장수가 판단해야했다. 전진 과정이나 주둔 시에 맞닥뜨리게 되는 전투에서 어떤 전술을 택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도 자신에게 달려있었다. 영천성에서 의병과 싸운 일본군을 파악하기 힘든 이유는 이처럼 각 부대가 독립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영천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 부대가 누구의 부대인지, 전투에 참전한 이가 누구였는지를 전하는 사료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본 논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급한 여러 종류의 부대 배치 명령서 등을 활용하여 영천성 전투에서 조선군과 싸운 일본군은 9번 부대 이후에 조선에 들어온 소규모 장수의 부대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모리 데루모토, 혹은 도요토미 히데카츠 휘하의 부대였을 가능성도 검토해보았다. 그리고 영천성 전투가 벌어진 시기 경상좌도 일본군의 행동 양상은 모리 데루모토 휘하 부대의 기록을 통해 추정하였다. 전쟁 초반부터 벌어진 일본군의 약탈과 폭력은 조선인의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인의 저항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일본군은 영천성 전투와 비슷한 규모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를 겪었다. 이후 일본군은 주력부대는 명군이라는 새로운 적에 대응하기 위해 한성에서 평양을 잇는 선에 집결하였다. 경상좌도에 남은 일본군은 곳곳에 설치한 주둔지에서 철수하여 방어가 수월한 거점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군의 주요 통로이자 주둔지였던 경상좌도를 회복할 힘을 얻게 되었다.

Abstract

To evaluate the activities of the righteous voluntary army during the Imjin War period, it is imperative to grasp those of their adversaries, the Japanese army. Researches up until now have not focused on the activities of the Japanese army and some of them even illustrated the circumstances based on inappropriate grounds. Every battle needs at least one army and its counterpart. Without analyzing the adversaries and the materials written by them, it is hard to fully reconstruct the circumstances of a battle only with the materials written by people of Joseon to reflect it's perspective. This is why we need to understand the activities of the Japanese army using Japanese historical records. During the war, the Japanese army moved on war footing directed by the order of deployment of Toyotomi Hideyoshi. They had to follow Hideyoshi’s grand strategy of invading Ming China. Yet each troop consisted of a general, his vassals, and the soldiers under their command and it had to procure its own rations and forces. How they procure the provisions was up to the judgement of the general: he had to make his own decision whether to pillage, to transport them from its domain, or to rent. He was also given mandate to decide what kind of tactics they would take for the battles during the army’s advancing or stationing. The independent nature which each troop assumed renders it hard to trace the Japanese troops; information on the Japanese army, such as to whom the troop belonged, who participated in the battle, is hard to find from historical records. And this is why it is hard to grasp the Japanese army who fought against the righteous voluntary army at Yeongcheon fortress. Using various orders of deployment issued by Toyotomi Hideyoshi, this article argues that the Japanese army who participated in the Battle of Yeongcheon Fortress must have been small scale troops which entered Joseon after the 9th troops or troops under the Mori Terumoto and Toyotomi Hidekatsu. Meanwhile, from the records of the troops under Terumoto, this article traced the activities of the Japanese Army in Kyeongsang Province during the period of Yeongcheon fortress. From the early phase of war, pillage and violence by the Japanese army incurred strong resistance of Joseon people. Yet the Japanese army could not cope with situation and the righteous army staged a series of riots here and there. After the battle at Yeongcheon Fortress, the Japanese army suffered repeated defeats at subsequent battles of similar scale. After that, the main body of the Japanese army assembled along the line from Hanseong to Pyeongyang in order to defend the region from their new enemy, Ming army. The remnant troops left in Kyeongsang Province retreated from their various posts and gathered into positions where they could easily defend themselves. This made it possible for Joseon to recover the region which was exploited as main passage and posts of the Japanese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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