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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일본 내 운동세력의 동향 - 1920년대 재일조선인 운동세력과 일본 사회운동세력을 중심으로 -

The Massacre of Koreans during the Great Kanto Earthquake and Trends in the Movement of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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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이 글은 1923년 관동대지진을 전후로 재일조선인 운동세력과 일본 사회운동세력의 조선 이해와 관동대지진에 대한 대응과 움직임에 주목하여 고찰하였다. 재일조선인 운동세력은 민족적, 계급적 문제에 주목하였고, 그것은 일본 사회운동세력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민족적, 계급적 문제 보다는 개인적문제가 우선이었다는 점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전부터 조선과 일본의 계급적 관점의 국제적인 연대는조직적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반제국주의적 성격의 조·일(日) 연대 투쟁은 일본 내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이라는 대규모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 현상은 변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문제 보다국제연대를 우선적으로 사고하던 재일조선인은 이미 국제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일본 사회운동에 깊이 들어가서 적극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직후에는 조선인이 무참히 죽어 가는상황에서 재일조선인 조직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선진적인 재일조선인 조직도학살사건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였다. 전술도 없었고 규탄 투쟁도 전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천도교와 기독교 조직에 기초한 조직화된 재일조선인활동가, 유학생들은 모일 수 있었다. 이들은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에주목하면서 도쿄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1923년 10월 도쿄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직은 국내와 조직적인 연계의 틀을 갖고 있었다. 국내에서 전국적인 연계 모습도 확인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조선인이 학살된 이 시점에도 친일적 모습을 견지한 그룹이 있었다. 박춘금과 상애회가 그들이었다. 이들의 친일적 추도회는 식민지 지배의연결선에 있었고 단순히 세력 확장의 도구였다. 한편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이후 1년 이후 재일조선인과 일본 정부와 시민 사회는 각자의 방법으로 기억을 하고자 하였다. 일본 정부는 진재기념당과 재건기념관을 통해 이를 추진하였다. 본질적으로 그들이 기억하는 추모는 일본이 중심인 반인륜적인 내용이 주였다. 이들 보통 일본 사회, 일본인에게 조선인학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전 기간을 통해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은 기억되어 왔다. 이는 재일조선인 각종 단체가 있어 가능하였다. 이들 단체의 주도로 1923 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년 이후인 1924년부터 추도회가 열렸다. 재일조선인은 매년 9월 1일, 이날을 일상적으로 기억하고 기념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있다. 기억의 공간에서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제노사이드로 남아 있고,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둘러싼 일본내 재일조선인 운동세력과 일본 사회운동세력의 움직임은 본질적인 한계를 노정해 왔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패배자가 되어, 결국은 나뉘었던 것이다.

Abstract

This paper focuses on Joseon through the power of social movements in Japan at the time of the Great Kanto Earthquake in 1923, and on Korean residents in Japan. The international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Japan had come to be established before 1923. In particular, anti -imperialism movements were active, but the Great Kanto Earthquake changed matters greatly. However, Koreans residing in Japan who cared not for nationalism but for internationalism had become active together with Japanese social movements. However, soon after the Great Kanto Earthquake, many Koreans died in drastic situations, and many individual Koreans could not remain active in movements. Even Korean resident groups in Japan that were advanced could not react effectively. There was no denunciation of the struggle, however. As time passed, activists affiliated with Cheondogyo and with Christian faiths, and Korean students gathered. They had taken notice of the massacre brought by the earthquake and established the “Rescue Association of Korean Residents in Tokyo” in 1923. This group had connections in Japan and internationally, and this was clearly seen in domestic activities. On the other hand, there were pro -Japanese groups even among Koreans, such as Pak Chun -geum and the Sangaehoe. These two groups held memorial services with pro - Japanese points of view in order to expand their power. Meanwhile, one year after the Great Kanto Earthquake, Korean residents in Japan and the Japanese government (civil society) recalled their losses in various ways. The Japanese government built a memorial hall for the earthquake disaster and a reconstruction hall. Before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ended, the massacre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due to the Kanto earthquake was remembered. Various organizations made this possible. In 1924, many organizations in Japan held memorial services. And every year on September 1, people continue to commemorate the earthquake and the lo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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