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4~642년 고구려의대당(對唐)외교와 정국동향
Diplomacy with Tang China (唐) and Political Trends of Koguryo (高句麗) from 624 to 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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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24~642년 고구려 대당외교의 지향과 변화 양상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624년 당(唐)과 조공책봉관계를 수립한 이후 고구려는 일찍이 당 고조가 천명한 바 있던 평화공존의 대고구려정책(對高句麗政策) 기조가 지속성을 지닐 수있도록 유도하는 데 외교력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기대와 달리 625년3월, 당은 차후 정세변화에 따라 대고구려정책 기조를 공세적 방향으로 전환할수 있다는 내부 결정을 하였다. 이로 인해 양국은 조공책봉관계라는 형식의 내용을 향후 어떤 수준과 방식으로 구성해나갈지에 대해 합의하지 못하였다. 한편, 627년부터 동돌궐의 세력이 이완되면서 요서지역 제 종족(諸種族) 사회가크게 동요했던바, 이를 계기로 628년 9월 고구려는 당에 ‘형식적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전달하였다. 이는 당 측에 동돌궐의 약화를 틈타 요서지역으로 세력 확장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상징적 외교행위였다. 이를통해 고구려는 당 측에 양국 간 조공책봉관계 수립의 경위를 상기시키고, 당에서 평화공존의 대고구려 정책 기조를 재확인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630년당의 동돌궐 병탄을 계기로 시작한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성 역시 이러한 외교적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이상의 사실은 조공책봉관계의 수립이 곧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의 구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620년대 고구려 대당외교의 지향과 목표가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고구려의 일관된 외교적 노력에 파탄을 초래한 측은 당이었다. 당은 631년 8월 이른바 ‘경관(京觀) 파괴 사건’을 도발하였고, 이에 고구려는 장기간 대당외교를 중단하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639년 돌연 대당외교를 재개한 후 이듬해에는 당에 태자를 파견하고 귀족 자제의 국학(國學) 입학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는 국제정세의 변화가 아닌 국내정치적 계기에 따른 것으로서 이 시기 영류왕은 정황상 자신의 후계구도(체제) 창출 일환으로 추정되는 정치(세력) 재편을 구상했던 것 같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영류왕은 국내 귀족가문의 분지화 현상을 활용하는 한편 대당외교까지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구려 조야(朝野)는 당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았던바 영류왕이 대당외교를 국내정치에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은여기에 있었다. 연개소문 제거 계획 역시 이런 맥락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그러나 해당 계획은 당시 고구려 정치체제 내에서 공식화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것이었고, 끝내 연개소문의 병권(兵權)을 박탈하지 못하면서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당하게 되었다. 요컨대 연개소문의 정변은 후계구도(체제) 확립의일환으로 ‘정치(세력) 재편’을 꾀하던 영류왕에 맞서 병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종래의 설명과 달리 연개소문은 대당강경파로 볼근거가 충분하지 않으며, 집권 후 그가 대당강경책으로 선회한 것은 고구려의내분을 획책하려던 당의 상대적 책임에서 기인한 바였다. 아울러 대당외교를 내정에 활용했던 영류왕의 통치술은 고구려 말기 왕권체제의 정치·사회적 기반및 사회 변동과 관련해 차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Abstract
This article discusses the direction and change of Koguryo’s diplomacy with Tang China from 624 to 642. From 624, Koguryo had concentrated its diplomatic efforts on inducing the Koguryo policy of peaceful coexistence that the Tang had already declared. However, unlike the expectation of Koguryo, in the third lunar month of 625 the Tang made the internal decision that it would be able to turn the policy of Koguryo in an aggressive direction in accordance with the change of circumstances. As a result, the two countries failed to agree on what level and on what manner to form the tributary appointment relationship (朝貢冊封關係). However, as the power of the Eastern Turks (東突厥) weakened from 627, nomadic society in Liaoxi (遼西) was shaken. In the ninth lunar month of 628, Koguryo delivered a “formal map” (封域圖) to the Tang. This was a symbolic diplomatic act to convey to the Tang the message that Koguryo would not seek to expand its power into the Liaoxi region as the Eastern Turks weakened. It seems that Koguryo reminded the Tang of the establishment of the tributary appointment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and reaffirmed the Koguryo policy of peaceful coexistence with the Tang. The expansion of the Great Wall of Koguryo (千里長城), which was started in 630 with the destruction of the Eastern Turks, was an extension of such diplomatic efforts. These facts indicate that the establishment of the tributary appointment relationship did not mean the establishment of a unified international order centered on China. At the same time, this shows that Koguryo’s diplomatic goals for Tang were consistent in the 620s. However, Tang caused the breakdown in Koguryo’s consistent diplomatic efforts. Therefore, Koguryo suspended long-term diplomacy with the Tang. However, in 639, King Yeongnyu (榮留王) suddenly resumed diplomacy with the Tang. In the following year, he dispatched a crown prince (太子) to the Tang and demanded the study of the nobility. This was not due to changes in international circumstances but rather to domestic political instability, and was an effort to establish King Yeongnyu’s succession. This attempt of King Yeongnyu faced the rebellion of Dae Yang (大陽), the brother of the king. But after 641, it secured the suppor t of the central and local governments. Subsequently, Dae Yang politically agreed with Yeon Gaesomun (淵蓋 蘇文), who was being held in noble society at the time, and King Yeongnyu appointed Yeon Gaesomun to the position of Great Wall of Koguryo Construction Supervisor in 642 in order to separate the two forces. Six months later, when Dae Yang died, the king Yeongnyu and nobles stimulated the removal of Dae Yang’s remaining force, Yeon Gaesomun. However, as the plan was leaked, Yeon Gaesomun conducted a coup. Unlike as suggested in previous studies, Yeon Gaesomun was not a hardliner in the Tang. Rather, he held a firm stance regarding the Tang after the seizure of power was largely undertaken by the Tang. His motive for a coup was a power struggle over the succession of the royal family, which became the defining element of the regime’s future direction. Finally, in the early 640s, King Yeongnyu’s rule became related to the change in the character of Koguryo-Tang diplomacy, and this must be studied in relation to the kingship regime and social change in this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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