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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영류왕의 對唐 조공책봉관계 수립 정책의 의미

The Policy of King Yeongnyu of Koguryo toward Tang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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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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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古代 韓中 朝貢冊封關係를 둘러싸고 한중일 삼국 간에는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대체로 중일학계가 조공책봉관계의 현실적 규제력을 강조했던 반면, 한국학계는 그것의 형식(명분)성을 강조하거나 被冊封國의 독자세력권을 공인받는 절차로 이해하였다. 이런 속에서 이 글은 고대 한중 조공책봉관계의 성격을 다른 차원에서 이해해보고자 하였다. 그 사례로 623년 12월, 고구려의 영류왕이 당에 먼저 조공책봉관계 수립을 요청한 사실에 주목하고 그것의 함의와 맥락을 살펴보았다. 이 사례는 당 건국이후 당과 조공책봉관계를 수립하지 않았던 ‘예외적 상태’에서 고구려가 먼저 당에 책봉을 요청한 점, 그리고 그 직후 역시 또 다른 피책봉국이었던 백제·신라의 대당통교를 차단한 사실 등에서 기왕의 설명만으로 충족될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고구려는 5세기 초 동북아 지역에 독자적 질서를 구축한 뒤부터 조공책봉관계를 對中外交의 ‘도구적 수단’으로 여겨왔고, 그런 점에서 조공책봉관계에 내재된 ‘德化論的 君臣關係’의 질서를 內面化하지 않았다. 특히 對隋戰爭은 고구려 집권층이 조공책봉관계가 지닌 허구성을 명료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영류왕대 對唐 조공책봉관계의 수립은 종래 구사된 현상 분석적 차원의 ‘名實論’적 접근이나 인식론적 차원의 ‘獨自勢力圈論’과는 다른 접근법이 요구되었다. 618년에 건국된 당은 그 직후 주변국 군장들을 책봉하지 못할 정도로 內憂外患에 시달렸다. 특히 이 시기는 東突厥의 ‘極盛時代’로서 당 조정은 돌궐을 대등관계를 의미하는 ‘敵國禮’로 대했다. 안으로는 군웅이 할거하는 속에서 돌궐의 변화무쌍한 침략과 타협, 그리고 물자요구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초기 당의 대고구려정책은 이런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동시에 당은 隋代 對高句麗關係의 경험과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런 사정이 중첩되어 당 초기 대고구려정책은 두 潮流를 띠게 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고구려를 경계,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와의 안정적, 평화적 관계를 추구하는 정책이었다. 특히 전자의 양상은 618년∼621년까지 두드러졌다. 고구려와 접경한 隋代의 遼西郡인 燕州에 總管府를 설치하고 反高句麗的 인물인 突地稽를 총관으로 임명한 점, 연주총관부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한 점, 당 고조가 新羅使의 방문에 특별히 우대하고 答訪使를 파견한 사실 등은 그 사례이다. 그러나 621년 이후 돌궐의 침입이 가중되고 산동의 群雄 柳黑達이 세를 떨치면서 당의 대고구려 견제책은 한계에 봉착했다. 무엇보다 대외적 안정과 평화가 절실해졌고, 이런 수세적 맥락에서 外的 변수인 고구려에 대해서도 정책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의 표현이 622년 당 고조가 고구려에 보낸 국서였다. 여기서 당 고조는 역사적으로 고유한 고구려의 요동 통치사실을 존중하고 상호 평화적 관계에 입각한 강토 보전을 제안했다. 더불어 쌍무적 포로 교환을 제안, 실천했다. 당 고조의 ‘夷狄과의 평화공존론’은 명분과 실제의 차이라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명료한 인식인 동시에 對民안정시책이자 隋 왕조와의 차별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당의 정책기조는 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었다. 한편, 고구려는 당 건국 이후 지속적인 使行을 통해 당이 처한 상황에 대한 면밀한 정보 수집과 함께 당의 대고구려정책 향방을 가늠해보려 하였다. 그런 한편 요서지역에 대한 잇따른 당의 조처에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요서지역에 대한 군사적 공세가 아닌 평화적 방향을 택하였다. 이어 당 고조에게 삼국 간 상쟁과 원한감정을 주지시킴으로써 향후를 대비한 외교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당 고조가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 당의 대고구려정책 기조를 공식화했다. 이 무렵 당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고구려는 국서에 표명된 정책기조의 신뢰성을 높게 판단한 듯하다. 이에 대수전쟁 승리의 상징물이었던 포로 교환 제의에 응했다. 이어 당은 623년 연주를 幽州盛內에 寄治했다. 이는 대고구려관계에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623년 연말 영류왕의 대당 책봉요청은, 당의 평화적 대고구려정책 기조에 대한 호응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고구려는 동돌궐과 당 사이의 ‘대등(적국)관계’ 및 ‘침략-피침략’의 현실을 직접 목도하였고, 이런 속에서 대당 책봉요청은 동돌궐과의 차별화를 꾀하는 외교 전략이 될 수 있었다. 즉 외형상 군신관계를 설정하며 ‘적국관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조공책봉관계의 수립을 통해 고구려에 대한 당의 경계심을 풀어주고, 당 고조가 국서에서 표명한 뜻대로 양국관계를 평화적으로 운영해나가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수동적 호응’이 아닌 ‘능동적 호응’이었다. 고구려가 선제적으로 책봉요청을 한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그 직후 백제, 신라의 대당통교를 방해하는 이율배반적 조처를 취한 점에서 이런 면을 엿볼 수 있다. 즉 당의 평화적 정책기조를 조공책봉관계의 수립을 통해 고구려의 안위 및 국제적 이해관계에 활용하려는 전략적 포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親唐政策이 아닌 적극적 외교정책의 산물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 시기 한중 조공책봉관계를 ‘국제정치’의 시야에서 보아야 그것의 성격과 본질을 명료히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Abstract

The reign of King Yeongnyu (榮留王) has received little attention in studies of Koguryo history. This monarch’s policy toward Tang(唐)China has been understood as a moderate policy. Thus, King Yeongnyu has been considered a moderate toward Tang. On the other hand,YeonGaesomun (淵蓋蘇文) has been seen as a hard-liner toward Tang. Such views have passed over the dynamics of King Yeongnyu’s policy toward Tang. King Yeongnyu sent envoys to China in 618. This was a rapid diplomatic response. There also were frequent missions dispatched to gather information about the situation in China. At this time, Tang appointed Tudiji (突地稽), who was of an anti-Koguryo disposition, as the administrator (總管) of Yanzhou (燕州). In this way, the ruling group in Tang remained alert and checked Koguryo. This awareness regarding Koguryo among Tang’s ruling group had taken root during the Sui (隋) period. However, China continued to consider this an unstable situation, and pursued a stable relationship. Koguryo acted similarly, too. King Yeongnyu pushed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冊封-朝貢) between Koguryo and Tang in 623. In this way,King Yeongnyu pushed a policy toward Tang based upon the strategic importance of Koguryo. Thus, King Yeongnyu was not a moderate toward Tang, and his policy toward that country expressed ca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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