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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五峯書院의 설립과 院任조직의 운영

A study on the estavlisment of Gangnung Obongsowon and the administration of Wonim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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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五峯書院은 명종 11년(1556)에 건립되었다. 出仕하여 경륜을 갖춘 40대 후반의 七峯 咸軒을 중심으로 규합된 20대 초반의 香湖 崔雲遇·栗谷 李珥 등이 서원 건립의 주도세력이었으며, 이들은 退溪 李滉 중심의 嶺南士林과 聯網을 구축하고 새로운 학문풍토를 모색하였던 신진세력이었다. 이들의 서원 건립은 嶺·湖南에서 시작된 서원건립의 추이를 인지하였던 데서 비롯되었고, 鄕里의 침체된 학풍을 진작하고 鄕校 교육의 수용한계를 극복하려는 현실인식과 인재를 양성하여 文鄕이라 칭송되는 鄕評을 다시 구현하려는 의도를 갖는 것이었다. 이들은 서원을 先賢의 맥을 잇는 私學으로 인식하고 “선현의 舊基”를 물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서원의 정제성에 대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봉향할 인물을 물색하지 못한 채 중국의 4대 서원의 사례에서 파악되는 침체된 학풍 진작을 명분으로 工役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먼저 장소를 물색하고 鄕老들의 동의를 구하고 府使와 監司의 협조를 구하는 형식으로 공론화의 과정을 밟았다. 다시 ‘鄕中救助書’를 통해 鄕人의 동참을 유도하는형식으로 향중 공기구로서 서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소요되는 물적․인적 재원을확보하였다. 서원은 3년 만에 완공되었다. 鄕校의 校生들이 工役을 주관하고 사찰 승려들의 丹雘 기술이 원용되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봉향 인물 선정이 조율되었고, 칠봉 함헌이 書狀官으로 명나라에서 구득해 온 孔夫子影幀을 모시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리고 율곡 이이는의례를 정비했으며, 그것은 春秋에 焚香만하고 香燭은 官府에서 奉進하는 것으로 향교의釋奠禮와 차별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부자를 모시는 문제는 사림계와 지방사회에서 서원의 정제성에 벗어나는 것으로 회자되면서 갈등을 유발하였다. 이 시기에 주도세력이 “書院圖”와 “工役의 顚末書”를 갖추어 퇴계 이황을 방문하여 “記文”을 요청하였던 사실은 그 타개책의 일환이었다. 퇴계는 이를 거부하는 것으로 공식적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이어서 서원의 완공을 축하하는 詩文을 전달하여 사적으로는 서원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였다. 퇴계의 이러한 자세는 사림계에 회자되는 논란을 불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봉서원은 斯界로부터 인정받을수 있었다. 서원의 院任조직은 齋任 체제였다. 이 운영체제는 창건으로부터 120년 동안 지속되었고, 이 시기 서원운영은 嶺南士林과 聯網을 이루었던 이 지방 사림들의 학문적 성향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이었다. 17세기 중반에 원임조직은 京院長-縉紳有司-齋任 체제로 정비된다. 老論系 고위관료를 경원장으로 추대하는 이 체제는 이 지방 사림들의 黨色 표방이었으며, 중앙의 노론계 인사와 聯網을 이루었던 이 지방 사림들의 특성이 서원운영에투영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원임조직과 함께 山長-有司 체제가 운영되었다. 향중의 명망 있는 유력인사를산장으로 추대하는 이 조직은 서원의 重修를 위한 추진주체로서 監司·守令의 협조적 관계를 도출하는 역할이 주목되며, 사업의 완공 이후 해체되는 한시적이라는 특성을 갖는 체제였다. 한편 18세기 후반에는 서원의 운영을 둘러싸고 향중 유림이 분기가 두드러졌다. 이 양상은 서원의 원임조직과 山林丈席-京掌儀-有司 체제가 공존하는 구도에서 야기되었고,이 공존체제는 향중의 유력한 가문에서 門中書院을 건립하기 위해 산림장석을 山長으로추대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경원장과 산림장석이 같은 노론계 인사였고, 이 점에서 동일한 당색이 향중 유림의 대세였지만 이들의 분기양상은 문중의 입장이 상충되면서 야기되는 것이었다. 주부자영정의 配享을 두고 야기된 이들의 갈등은 각기 경원장과 산림장석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고 그들의 題辭에 힘입어 자신들의 입장을 향중에 공론화하려는 경향을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에도 불구하고 분기된 향중세력간의 갈등은 鄕權을 염두에 둔 문중간의 대립구도에서 상대세력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국면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鄕戰·儒戰으로 비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갈등은 중앙의 산림 세력이 몰락하면서 종결되었고, 그것은 조정에서 임명한査官의 판결에 의한 것이었다. 이 같은 양상은 서원을 향중의 공기구로 인식하고 공론에의거해 그 운영을 지향해 온 유림의 자율적 성향과 그들의 지도적 위치에 놓였던 경원장과 산림장석의 역량에 한계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중간의 대립국면은 여전히 재연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Abstract

Obongsowon in Gangneung constructed in 11 years of Myung-jong times(1556). The leading power of it was a rising power who searched new style of study with interacting with Yengnam-Sarim. They recognized trend of construction of sowon started in Yeungnam and Honam, and they tried to overcome limit of reception of Hyangkyo, and they tried to recover honor of the region through it. They operated public service because they could not secure persons for sowon. And they asked acception from Hyangno, Busa and Gamsa, and made construction of sowon as issues and led participation from citizens and secured material and population source for it. The sowon was completed in 3 years. During this period, in public service,construction techniques of students and teachers of Hyangkyo and monks were accompanied and it was set to deify Gungbuja-Yeongjung taken from Ming for sowon, and Yulgok-Yiyi equipped etiquette for this features. However, enshrining Gongbuja made conflict by that it was get out of identity of sowon for Sarims. And leading power tried to solve this problem with help of Toegye who was chief of Sarim. He delivered literature to celebrate construction of sowon and Sarims started to accept Obongsowon. Wonim-organization of sowon was Jaeim system composed of two persons. This system was endured for 120 years and operation of sowon in this time was put in extended context in features and trends of Sarim in the area who were interacted with Yeongnam-Sarim. Kyengwonjang-Jinjinyusa-Jaeim. This system having high officers of Noron as the Kyenwonjang was expressed party color of local Yurim and meaned that interaction with central people in Noron was reflected in operation of sowon. And Sanjang-Yusa system was operated. This organization to have leading people in the local area over a Sanjang was leading subject to perform for operation and management of sowon. Especially, it was focused on role to take corporation of Gamsa·Su-ryung and it was temporary because it was dissolved after completion of construction. In late 18 century, the operation of sowon reflected relation of interest of activated Munjung. They pursued a relationship with Sarim power of central and raised their position. They made conflict by diverging around enshrine of Chubuja-Yeongjung and it became to flames leap to aspect of Hyang-jun with that they considered leading right of local society. The conflict in this period was ended with collapse of Sanrim power, and it was caused by determination of government. It was shown that limit of autonomy of Kyengwonjang and Sanrim-Jangs, and local Yur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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