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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대 ‘회답겸쇄환사’의 파견(1617년)과 대일본외교

The dispatch of ‘HoedapkyomSuihwansa’(1617) and the Diplomacy toward Japan in the reign of Gwanghae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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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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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정부의 정책적 관점에서 광해군대 1617년의 ‘회답겸쇄환사’ 파견 경위와 의도 및 사행의 역할에 대해 검토한 것으로, 임란 이후 ‘회답겸쇄환사 외교’가 조선후기 대일본 통교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 본 것이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광해군은 즉위 초기단계에서는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쇼군을 조선 국왕의 외교상대로 인식하되 특별히 긴장이 발생하지 않는 한 빙문을 전제로 한 적례외교로는 확대하지 않으려 했다고 보았다. 1608년 대마번 사자가 일본의 ‘국사’라 칭하며 선조의 상에 대한 진향을 위해 상경을 요구했을 때 이를 거절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1609년 기유약조에서도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이 보내는 사자를 ‘(일본)국왕사’로 상정은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대마도주의 문인(文引)을 지참하도록 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문인 규정은 임란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마도주에 대한 특혜를 인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국왕사라 하더라도 대마도주 문인 지참이라는 입국절차를 설정함으로써 도쿠가와 막부와 사절 교류가 확대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고 보았다. 둘째, 조선은 1613~1615년에 걸쳐 대마번이 도쿠가와 막부의 제2대 쇼군 히데타다(秀忠)의 딸과 천황가의 혼사 축하를 명분으로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해 왔지만 명의 허락을 이유로 응하지 않았는데, 쇼군가의 조경사에 빙문하는 적례관계는 신뢰가 형성된 후에라야 가능하다는 선조대의 방침을 견지한 것으로 보았다. 조선이 일본의 통신사 파견 요청을 외교 현안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1615년 ‘오사카 전투’ 이후 이에야스의 정국 장악 소식이 계기가 되긴 했으나,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이에야스(家康)의 사망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행 목적이 이에야스의 사망을 빙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에야스 사후 히데타다(秀忠) 정권의 대조선정책에 대한 불안감이 정탐외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셋째는 1617년 사절 파견의 계기가 이에야스의 사망과 관련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절 명칭이 조문을 위한 ‘통신사’나 ‘정탐사’가 아니라 ‘회답겸쇄환사’였던 이유를 검토한 바, 대내외적인 명분 확보를 위해서였다고 보았다. ‘회답겸쇄환사’라는 명칭에서 ‘쇄환’이라는 문언은 정신도의 ‘상소’를 계기로 사행이 떠나기 직전인 1617년 5월에서야 추가되었는데, 사행 명칭은 일본에 가져가는 광해군의 국서가 아니라, 대명외교문서에 기록되었다. 당시 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당사국이었던 일본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빙문을 전제로 하는 적례외교사절이 아니라 피로인 쇄환 등, 전후처리를 위한 한시적인 사행임을 어필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였다고 생각된다. 또 ‘회답겸쇄환사’의 ‘쇄환’이라는 문언은 국내적으로는 전후 25년이 지나도록 전쟁피해 복구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국내의 반일정서를 진정시키기 위한 명분 확보용으로 보았다. 『광해군일기』와 『비변사등록』과 같은 정부기록에 피로인 쇄환에 관한 상소문, 행정문서에 ‘회답겸쇄환사’라는 명칭을 의식적으로 남기려 했던 것은 비록 400년 전이라 하더라도 민의를 무시한 외교는 성립되기 어려웠음을 지적하였다. 한편, 광해군대 1617년 제2차 ‘회답겸쇄환사’ 파견은 임란 이후 260여년에 걸친 대일본외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선 하나는 광해군대의 대일본 외교가 결코 소극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 전하는 광해군의 국서는 ‘위서(僞書)’로 대마번의 구체적인 개작 부분은 알 수 없다. 그러나 1617년 제2차 ‘회답겸쇄환사’의 정사 오윤겸이 ‘전명의’ 당일날 쇼군(秀忠)에게 구두로 전한 광해군의 사행 파견 취지가 “일본의 大坂 평정을 축하하며, 앞으로 신의를 잃지 말고 수호를 돈독히 하자”였던 것으로 보아 광해군 국서의 취지도 이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즉 신의에 바탕을 둔 우호를 어필하여 조일간의 긴장을 완화시킴으로써 누르하치 세력이 명을 위협할 정도로 커진 가운데 남쪽 안보에 대한 부담을 덜어보려 했던 것으로 보았다. 둘째는 조일 교린외교 시스템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회답겸쇄환사’의 정사 일행이 히데타다(秀忠)의 국서를 수령하는 과정을 보면, 문제 발생시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막부의 집정이나 쇼군 당사자 등, 막부측에 구두 내지는 문서로서 조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조선국왕이 막부의 쇼군 앞으로 ‘회답겸쇄환사’를 직접 파견하여 외교문서(국서)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임란 이후 대마번을 통한 간접통교 시스템 속에서 언제든지 일본의 중앙정부를 상대로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루트를 확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직접 루트를 확보했다는 것 자체가 대중국 사대외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으로 향후 전개될 일본의 대조선 외교에서 대마번에 대한 견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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