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와 이두훈의 현실인식 변화와 독립운동
Lee Doo-hoon's Changing Perception of Reality and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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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이두훈은 1856년생으로 한주 이진상의 문하다. 그는 이진상의 아들인 이승희, 곽종석 등 일명 한주학파와 함께 행동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당시 일본과의 수교 및 최익현의 귀양을 인지하였고, 1895년에는 「포고천하문」의 초고를 작성하는 등 일본에 적극적으로 항쟁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후 다시 ‘자정’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이두훈이 다시 일제에 항거하게 된 시기는 을사늑약 체결 이후였다. 1904년 그가 곽종석과 김규화에게 보내는 편지에 보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자정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곽종석이 이를 반대하고, 체결에 가담한 대신들을 처벌해줄 것을 상소를 통해 반복해서 상주하자 이두훈 역시 이에 적극적인 입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두훈은 이승희, 김창숙, 장석영 등 동학과 함께 서울로 상경하여 을사늑약 반대와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하였다. 1906년 그는 국권회복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그가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회 고령군단연상채소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고령군단연상채소 회장에 취임한 이두훈은 대표 인원을 구성하고,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국채보상운동 이후에는 이승희와 함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려고 했으나, 이승희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Abstract
Lee Doo-hoon was born in 1856 and was a student of Hanju's Lee Jin-sang, who also acted with Lee's sons, Lee Seung-hee and Kwak Jong-seok, in the so-called Hanju School. He was aware of the diplomatic relations with Japan at the time of the signing of the Treaty of Japan in 1876 and the situation of Choi Ik-hyun. Meanwhile, he wrote the first draft of Pogocheonhaemun(布告天下文), but when nothing changed, he changed his position to the midnight position again. It was only after the signing of the Forced treaties in 1905(乙巳勒約) that he began to actively take action. In 1904, in a letter to Kwak Jong-seok and Kim Kyu-hwa, he emphasized the need to wait until midnight instead of taking active steps. However, after the signing of the Forced treaties in 1905, when Kwak Jong-seok repeatedly appealed against the Forced treaties and to punish the vassals who participated in the signing, Lee Doo-hoon took a more active stance. Lee traveled to Seoul with Lee Seung-hee, Kim Chang-sook, Jang Seok-young, and others to advocate against The Protectorate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concluded in 1905 and the punishment of the Eulsa enemies(乙巳五賊). In 1906, he became interested in National Rights Recovery Movement(國權回復運動), and in 1907, he was appointed chairman of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國債報償運動)'s in Koryeong where he organized representatives and recruited pensioners. After the movement, he went to Manchuria with Lee Seung-hee to participate in the construction of an independence movement base, but he was unable to fulfill his intention due to Lee Seung-hee sudden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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