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蓋鹵王代 左・右賢王의 수여 배경과 그 정치적 의도
The Background of the Granting of Jwa Hyeonwang and U Hyeonwang during the Reign of Baekje's King Gae-ro and Its Political Intentions
1
조회
0
다운로드
0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개로왕은 근친 왕족인 곤지 등에게 북방민족의 위호인 ‘좌・우현왕’을 수여하고, 이를 유송 황제에게 추인을 요청했다. 좌・우현왕의 수용경로에 대해서는 대체로 4세기 이후 남북조와 ‘단기간’의 교섭 및 교류를 통해 관련된 이해를 얻었을 것이라고 설명된다. 그러나 위만조선과 낙랑군이 흉노와 교섭 및 교류하였을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흉노의 위호에 대한 이해는 3세기 말 낙랑군 출신 중국계 관료가 형성되는 때부터 시작하여 5세기 남북조와 직간접적으로 교섭・교류하는 단계까지 ‘장기간’에 걸쳐 백제 사회에 축적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좌・우현왕은 본래 군주의 차기 후계자이자 군사권을 장악한 유력세력이 맡았다. 좌・우현왕은 5세기에 빈번히 발생한 왕위계승 갈등 상황 속에서 왕제 등의 근친 왕족이 가진 왕위계승 자격과 위상을 부정할 수 없었던 현실이 반영된 것이었다. 기존의 태자제와는 별도로, 개로왕은 자신에 대한 ‘충성’과 ‘공로’를 근거로 근친 왕족에게 좌・우현왕을 수여함으로써 근친 왕족의 왕위계승 자격과 서열에 국왕이 직접 관여하고자 시도한 것이었다. 또한 왕족에게 군사권을 내포한 좌・우현왕을 수여한 것은 왕족이 가진 사적 군사력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형식적으로나마 국왕이 통할할 의도를 가진다. 이처럼 좌・우현왕은 왕족에 대한 ‘대우’와 ‘견제’ 의도가 함께 반영된 것으로 개로왕대 ‘왕족 중심 지배체제’의 상징이라기보다는, 근친 왕족의 예우에 대한 ‘타협’과 ‘조정’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461년 곤지의 왜국으로의 파견과 472년 불사후 여례의 존재를 통해 좌・우현왕보다 지명과 결합한 왕・후호가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왕족에 대한 예우는 계속되었지만, 차기 후계자로서의 위상은 약화된 것이었다. 475년 한성함락과 웅진천도 사건은 부여씨 왕족 집단에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정국의 혼란 속에 문주계가 소멸하고 곤지계인 동성왕이 왕위를 이으면서 부여씨 왕족 뿐만 아니라 이성귀족에게도 왕・후호가 적극 수여되었고 그 대상자의 폭이 확대되는 양상이 주목된다.
Abstract
The titles of Jwa Hyunwang and U Hyunwang originally referred to influential figures with a claim to the throne and military authority. These titles reflected the reality that, during the 5th century, the royal family, particularly the king’s brothers, could not be denied their qualifications and status as heirs to the throne in the midst of frequent succession conflicts. Unlike the existing crown prince system, King Gae-ro sought to directly influence the succession qualifications and hierarchy within the royal family by granting the titles of Jwa Hyunwang and U Hyunwang to close royal relatives based on their ‘loyalty’ and ‘merit.’ Furthermore, by awarding these titles, which included military authority, to royal family members, the king aimed to formally exercise control over their private military power. In this way, the titles of Jwa Hyunwang and U Hyunwang reflect both an ‘honor’ and a ‘restraint’ toward the royal family, and can be understood not as symbols of a ‘royal family-centered governance system’ during the reign of King Gae-ro, but rather as a product of ‘compromise’ and ‘adjustment’ with influential royal relativ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