端磎 金麟燮의 生涯와 學問
The Study of Dangae Kim Iinsub' Life and Scholarly Attain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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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端磎 金麟燮은, 18세기 慶尙右道의 學問的 中興期 초반에 활동한 학자였다. 正祖의 嶺南 중시 정책 이후 일어난 경상우도의 학문적 분위기를 주도한 인물로, 시기적으로 晩醒 朴致馥과 許后山의 중간에 위치한 학자였다. 그는 20세 때 文科에 급제하여 사환함으로써 전도가 양양하였으나, 참된 학문을 하겠다는 신념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朱子學의 튼튼한 기초 위에서 退溪學統의 嫡傳인 定齋 柳致明의 문하와 近畿學統의 적전인 性齋 許傳의 문하를 아울러 출입하여, 學問의 근본을 확고히 하면서도 실용적인 면도 중시하였다. 그는 南冥을 극도로 尊仰하면서도 남명의 학문자세와 實踐躬行의 정신, 出處大節 등을 그대로 배웠다. 참된 유학자라는 측면에서 退溪學을 전승하려는 사명감도 강하게 갖고 있었다. 1862년 丹城縣에서의 농민저항운동에 농민을 전적으로 지지한 것도 이런 실천적인 학문태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性理說에 있어서는 主理說과 主氣說 모두를 부정하였고, 특히 주리설의 극단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는 寒洲 李震相의 心卽理說을 극력 비판하고, 그 확산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性理學, 禮學 등 이론적인 저술은 하지 않았고, 주로 실질적인 공부에 치중하였다.
Abstract
Tangae Kim Iinsub was a scholar as well as a government official in the 19th century. Especially, he is famous as a leader of the insurrection of Tanseong people. When he was twenty years old,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Gwageo)and took various official ranks for about twelve years. When he was thirty-two years old, however, he retired to his home town since he felt that the royal court at that time was extremely corrupt and, moreover, he had an ardent wish for his academic research. Thereafter, he had been absorbed in his studies while associating with various scholars at Youngnam area. His studies covered a wide range. But he was greatly influenced from Namyeong and Toegye. He wrote more than 10 books as well as collections of works. He had very esteemed Namyeong, so his principle for his life had taken Nammyeong as his model in large extent. also He had very esteemed Toegye as the model of stud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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