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 이전 동맹휴학의 성격
Characteristics School Strike before Gwangju Student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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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고는 3·1운동 직후부터 1928년까지 학생에 의해 전개된 동맹휴학을 1919, 1920, 1921~1928년의 세 시기로 나누어 전개 양상과 그 내용을 분석하였으며, 동맹휴학에 대한 당시 언론의 인식을 살펴본 것이다. 1919년 3~4월에 가장 먼저 맹휴를 실제 행동으로 보인 곳은 보통학교였다. 6월 중순 이후 민중에 의한 시위운동은 퇴조해졌지만 전국 대도시의 고등보통학교 이상의 학교에서 맹휴가 속출하였다. 2학기에 들어서도 총독부가 전국 학교에 지도방침을 하달하면서 확산에 대비하였으나 맹휴는 계속되었다. 이 시기 맹휴는 항일운동 이외에 학내의 불만에 대한 요구를 위한 수단으로 그 원인이 전환되고 있었다. 1920년에는 연초 고종의 국상 일주기에 경성에서 맹휴가 일어났다. 이어서 3·1운동 1주기에 총독부의 강력한 대처 지시에도 불구하고 서북지방의 일부 보통학교와 도시 소재의 일부 사립학교에서 맹휴가 발생하였다.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4월부터 맹휴는 학내의 제반 현안을 문제 삼아 전국의 공사립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발생되었다. 1920년에 적어도 26개교에서 32회의 맹휴가 발생하였다. 1921~1928년 맹휴는 점차 증가추세를 보이면서 1920년대 학생운동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일제의 1920년대 맹휴 분석에 의하면 8년간 400여 건의 맹휴가 발생하였고 1927년과 1928년이 가장 절정을 보였다. 전체적인 횟수로는 공립에서 많이 일어났으나 맹휴율은 사립이 단연 높았다. 초등학교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초등에서 많이 발생하였다. 중등학교 이상에서는 학교 수가 적은 사립이 공립보다 맹휴건수와 맹휴율에서 모두 월등히 높았다. 맹휴의 원인은 6가지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그중에서 학교설비·교칙·학과 등의 문제, 교원 배척에 관한 문제, 사상의 영향 등 세 가지 분야가 중심이었다. 특히 교원 배척이 절반 이상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교원양성제도와 권위적 교사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맹휴에 대한 『동아일보』와 『개벽』의 논조에 차이가 있었다. 이는 두 언론사 운영진의 성격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를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사회주의 단체의 지도로 발생한 맹휴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개벽』은 사회주의사상도 포용하는 입장이어서 맹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Abstract
This thesis analyzed the development processes and contents of school strikes from 3·1 Movement to 1928, by dividing into three periods, 1919, 1920, 1921~1928, and looked into presses’ recognition about the school movements. It was elementary schools that put into practice school strikes for the first time March~April, 1919. After the middle of June, demagogies decreased, but school strikes appeared in the schools, higher than high & common schools located in big cities all of the country. With 2nd semester starting, Josun Governogeneral Ministry tried to protect spreading school strikes and handed down instruction guidance to the schools all over the country, but school strikes continued. At the beginning of 1920, school strikes appeared in Kyungsung, on the annual of national funeral ceremony of the late King Gojong. Afterwards, on the annual of 3·1 Movement, respective class school strikes appeared in big cities, in spite of Josun Governogeneral Ministry’s order to cope with them strong. Afterwards continuously, in spite of supervision and oppression of Japan, even after April, school strikes appeared in the schools, public as well as private, issuing school problems. In 1920, in at least 26 schools 32 times’ school strikes appeared. In 1921~1928, school strikes increased gradually and became universalized as a school movement in 1920s. The analysis of 1920s’ school strikes under Japan reign says that about 400 strikes, at the highest in 1927 and 1928, appeared for 8 years. Generally, from the frequency perspective, the strikes appeared more frequently in public schools, but school strike rate was higher in private schools. There were more elementary schools than other class schools, and school strikes appeared in elementary schools. In higher-class schools than middle-class schools, private schools had much higher school strike frequency and rate than public schools, for there were less private schools than public schools. Japan reign analyzed the causes of school strikes, dividing into six. The important causes were the problem of school facilities, school regulations, and departments, the problem of excluding school employees, and the influence of idea. 『Donga-ilbo』 and 『Gaebyeok』 had difference in discussion on school strikes. It’s why top managements of two presses had differences in their characteristics. 『Donga-ilbo』 spoke by proxy right party of bourgeois nationalism and had a negative perspective on school strikes appearing sponsored by solist groups. But, 『Gaebyeok』 had an affirmative perspective on school strikes, for it accepted even solist id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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