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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직후 淸使出來와 정치외교적 의의

The Dispatch of Qing Dynasty’s Envoys and The Political-Diplomatic Significance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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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병자호란 직후 조선으로 파견된 청사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청사의 파견 목적과 한양에서의 교섭 활동 및 조선에서의 청사 접대를 살펴봄으로써 병자호란 직후 청의 대조선사행의 정치적·외교적 의미를 규명해보았다. 병자호란 직후 조선은 1637년 4월과 9월의 사행을 통해 청의 징병 요구 중지를 청하였다. 청은 1637년 10월에 조선에 인조 책봉을 이유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奏請한 것이 아니라 청의 자의로 파견한 사신이었다. 이때 청사는 향화인·한인·주회인 쇄환 문제를 중점으로 조선과 교섭하였다. 청의 대조선 사행에서 쇄환 문제는 중요한 교섭 사안이었다. 조선의 경우, 징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청에게는 조선과의 군신관계 유지와 이를 통해 청중심의 국제질서 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조선의 주청 없이 이루어진 인조 책봉은 조청의 조공책봉 관계를 현실적으로 성립시켰음을 의미한다. 청의 관심 문제는 1639년 11월 삼전도비 감독으로 온 청사의 출래에도 반영된다. 조선에서 인질로 잡혀간 왕세자의 귀국 또한 징병 문제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1637년 9월의 대청사행에 조선은 왕세자의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청에게 거절 당하였다. 1639년 2월에 조선에서 왕비와 왕세자의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 때 세자의 귀국을 위한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인조의 병세 악화로 조선은 청에게 왕세자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청의 입장에서 인조 책봉의 연장선에서 왕비, 왕세자 책봉을 시행한 것은 明制를 모방해서 조청의 계서적인 군신관계를 공고할 수 있는 절차였다. 청이 조선보다 먼저 왕세자의 책봉 요청을 요구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왕세자의 귀국을 고려할 사안이 아니었다. 정축약조가 맺어진 후, 조선에서는 청사를 접대하기 위해서 청사 접대 기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처음에 唐差에 대한 접대방식을 원용하고 청사를 접대하려고 하였다가 명사 접대의 규례에 따라 시행하였다. 1637년 10월 인조 책봉으로 온 청사에 대한 영접은 명사의 접대규정에 따라 청사 접대를 정례화하기 시작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1639년 9월의 滿達爾漢 일행에 대한 접대는 앞의 청사 접대와 차이가 있었다. 만대르한은 병문안하러 오는 差官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만대르한을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차관으로 보고 있었지만, 접대도감이 아닌 격이 가장 낮은 접대소를 설치하여 만대르한을 접대하였다. 이는 명 황제의 명을 받들어온 欽差官의 경우 조선은 접대도감을 설치하여 접대하였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는 정묘호란 이후의 金差 접대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청에 대한 반감이 접대방식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39년 9월의 만대르한과 11월의 마푸타 일행에 대한 영접에서 주목되는 사항은 인조가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 2차례 청사 일행이 왔을 때 인조는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9월의 청사는 차관이기 때문에 의례 규정상에 인조는 교영할 필요가 없었지만, 11월 마푸타 일행의 경우 인조는 마땅히 교외에 나가 영접해야 하였다. 그러나 1639년 11월부터 인조가 자신의 병환을 이유로 교영에 친림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선례가 되었다. 이후 조선은 국왕이 교영을 시행하지 않는 경우를 숙종대의 『通文館志』에 기록하여 하나의 관례로 만들었다.

Abstract

In this paper, by examining the purpose and the negotiation activities in Hanyang of Qing Dynasty’s Envoys dispatched to Joseon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the political and diplomatic significance of the Qing Dynasty’s Sahaeng(使行) toward Joseon was investigated.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Joseon requested an end to the Qing's request for conscription through Sahaeng(使行) in April and September 1637. In October 1637, the Qing dispatched an envoy to Joseon for the installation of King Injo without Joseon‘s resquest, and the Qing dynasty’s envoys negotiated with Joseon focusing on the issue of repatriation of Naturalized jurchen(向化人), Chinese(漢人), Joseon people who captured by the Qing tried to come back Joseon(走回人). The issue of repatriation was an important negotiation issue even in later Sahaeng(使行) toward Joseon. It can be said that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 most urgent task of Joseon was the resolution of the issue of conscription. However, what the Qing dynasty considered important was the maintenance of hierarchical relationship with Joseon and the establishment of a Qing-centered international order. Besides exemption from conscription, Joseon's other concern is the return of the crown prince. In September 1637, Joseon requested the return of the crown prince , but was rejected by the Qing Dynasty. In February 1639, an envoy was sent with a request for the installation of the queen and crown prince, and it was also expected that the crown prince could return to Joseon through the installation of the crown prince. After that, Injo's illness also made it a reason to request the crown prince to return to Joseon. However, from Qing's point of view, the installation of the queen and the crown prince was a procedure that could settle a hierarchical relationship of Joseon and Qing Dynasty.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Qing Dynasty mentioned the installation of Crown Prince before Joseon’s request. In November 1639, the Qing dynasty’s envoy who came for the monument of Samjeondo(삼전도비) stayed in Hanyang until December 5 and supervised the construction of the monument. All work was completed on December 8th. From the Qing point of view, the monument of Samjeondo was regarded as a symbolic space for the success of the Manchus and the victory of the war to Joseon. From the point of view of Joseon, it was the result of the defeat and a symbol of obedience to the Qing Dynasty. For the first time the Qing dynasty dispatched a envoy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Joseon discussed the standard of treatment for the Qing dynasty’s envoy. At first, it was intended to use the rules of treatment for Tangcha(唐差), but it was implemented according to the rules of treatment for Ming dynasty’s envoys(明使). the Qing dynasty’s envoy dispatched this time seemed to be satisfied with the reception of Joseon. In October 1637, the reception to the Qing dynasty’s envoy dispatched for the installation of King Injo was the first step in making the reception of Qing dynasty’s envoys regular. In September 1639, the reception for Qing dynasty’s envoy who is named Mandaerhan is different from that of the previous treatment for Qing dynasty’s envoys. It was because Mandaerhan w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差官) who came to visit King Injo. Joseon viewed Mandaerhan 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 who came under the emperor's orders, but the lowest level department(접대소) was installed to entertain Mandaerhan. This is different from the case of the reception for officials who were temporarily dispatched and served the Ming emperor's orders. It can be said that this was influenced by the the reception for Jin dynasty’s envoys, and the antipathy towards Qing was reflected in the reception. The reception of Mandaerhan in September 1639 and Maputa in November 1639 is another point worth noting. King Injo did not go out for greeting the two envoys. In September, Mandaerhan w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 so there was no need for Injo to greet according to the ceremonial regulations. However, it was a precedent that Injo did not greet envoy on the excuse of his illness from November 1639. Afterwards, Joseon recorded cases in which the king did not greet envoy and made it a cust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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