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5~16세기 內需司의 왕실 관련 銘文磁器 생산과 한계
The Production and Limitation of Porcelain with Inscription for Royals by Naesusa in 15th~16th-century Joseon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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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헌과 물질자료를 통해 15~16세기 내수사(內需司)의 왕실 관련 명문자기(銘文磁器) 생산과 한계를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1467년경 왕실 소용의 그릇은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 인 관요(官窯)와 내수사에 의해 이원적(二元的)으로 공급되었다. 왕실에서 소비하는 자기 가운데‘국용(國用)’은 관요에서, ‘내용(內用)’은 내수사에서 생산하였다. 하지만 언제 어떠한 이유로 내수사에서 왕실 관련 명문자기를 제작하였는지, 왜 내수사의 제자(製磁) 활동이 중지되었는지에 대한관심은 부족하였다. 백자는 세종대 어기(御器)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세조대는 그 수요가 한층 증대되었다. 백자의소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1464년 횡간(橫看)이 제정되었고, 1465년 공안(貢案)이 개정되었다. 왕실은 이전에 비해 사적으로 사용하는 그릇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이에 따라 1464년경 내수사에 사기장을 두고 ‘大’·‘中’·‘世’·‘處’명 자기를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내수사는 사기장 6명만 소속되었다. 백토(白土)나 시지(柴地) 등도 공급받지 못하여 백자 소비 확대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16세기 왕실의 재정 수요는 증가하였다. 그러나 왕실 관련 명문자기는 15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제작된 이후 생산 수량이 감소하였다. 이는 1501년 신유공안(辛酉貢案) 가행조례(可行條例)에 보이는 전용(轉用)과 가정(加定)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왕실은 늦어도 1490년경부터 사옹원의 백자를내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흐름은 1501년 신유공안 제정을 기점으로 일반화되었다. 왕실은 1501년 이후 감결(甘結)을 통해 사옹원의 물품을 공급받았다. 15세기 말~16세기초 관요는 체제가 안정되면서 왕실의 백자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내수사 사기장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수사는 1460년대 왕실 내 백자의 사적 수요를 담당하기 위해 요업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신유공안의 가행조례가 적용된 1501년을 중심으로 한 15세기 말~16세기 초 내수사에 의한 자기 번조는 정지된 것으로 보인다. 내수사와 사옹원에 의한 이원적 백자 공급 체제는 사옹원으로 일원화된것으로 판단된다.
Abstract
By around 1467, the white porcelain used by the royalty was supplied both by Gwanyo(官窯) which were branches(分院) of the Saongwon(司饔院) and Naesusa(內需司). The items for national use(國用) were produced by Gwanyo, and those for internal use(內用) by Naesusa. White porcelain was selected for King Sejong’s bowl(御器), which is why its demand soared. However, after Hweng’gan(橫看) was enacted in 1464, and as the Gong’an (貢案) was revised in 1465, it became more difficult to reliably obtain white porcelain for the royalty’s personal use. Following this, it is estimated that in 1464, Porcelain with Inscription (銘文磁器) were produced potters who belonged to Naesusa Only six Potters belonged to Naesusa, and because they were not provided with white clay (白土) and Siji (柴地), there were limitations in being able to respond flexibly to the rising demand for white porcelain. The production volume for prestigious porcelains for royals declined after peaking in the late 15th century. This is believed to have been influenced by the Junyong (轉用) and Gajung (加定), found in the government’s fiscal reform measures called Sinyugong’an (辛酉貢案) Gahaengjoriae (可行條例) of 1501. The royalty was supplied with white porcelain for internal use by the Saongwon, before and after 1501. At the time, Gwanyo had been stabilized in its structure, available to meet the royals’ demand for white porcelain. This is believed to have gradually diminished the role of Naesusa’s Potter. As a result, it is supposed that between the end of the 15th century and beginning of the 16th century, the dual white porcelain production by both Naesusa and Saongwon was consolidated by the Sao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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