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인천 성냥공장 여성노동자의 동맹파업
Strikes of Women Workers at Matchbox Factories in Inchon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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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인천하면 성냥을 연상하던 시절에 불렸던 ‘인천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정체불명의 군가는 지난 한 세기를 재조명하는 좋은 단서가 된다. 남겨진 기록의 눈높이가 아니라 역사의 뒤안길로 내몰린 까닭에 그 진정성마저 의심받으며 비속어로 희롱당한 인천 성냥공장 여성노동자의 눈높이에서 일제강점기 이들의 삶에 내재된 주체적 역량을 재조명해야 될 필요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고를 집필하게 된 소박한 동기인 동시에 목적이다. 특히 인천은 우리나라 성냥산업의 메카로 일컬어졌다. 이를 전제로 인천향토사연구자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은 인천에 세워졌고,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조선성냥(주)은 인천의 근대적 표상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한다. 그러다 보니 정체불명의 외국인이 제물포에 세웠다는 상호마저 모르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조그만 공방을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으로 내세우는 결과마저 초래하였다. 외래에 의해서 알려진 불분명한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1899년 4월 21일자 『제국일보』에 실린 광고내용을 바탕으로 서울 사동 충훈부 건너편에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고흥사(杲興社)를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으로 표상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식민자본으로 인천에 설립된 조선성냥(주)은 일본인에 의한 성냥생산독점체제를 유지하려는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창업한지 25년 만에 전국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이것이 조선성냥(주)을 통해서 내세울 수 있는 인천의 근대적 표상이라고 한다면, 뒷날 ‘인천 성냥공장 아가씨’로 비하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내몰려진 인천 조선성냥공장 여성노동자의 동맹파업은 성냥을 매개로 한 일제의 식민수탈에 대한 주체적 역량의 항거라고 하겠다. 이들은 인천 최초의 노동쟁의로 평가될 1921년 3월 10일 동맹파업을 시작으로 1926년 4월 2일과 12일, 1931년 8월 15일, 1932년 5월 2일 등 모두 네 차례 다섯 번의 동맹파업을 감행하면서 투쟁목표를 생존권 수호에서 노동권 쟁취로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1931년 8월 15일 공장을 점거한 상태에서 8월 26일까지 지속된 세 번째 동맹파업의 경우에는 김순이·이용림·윤기영·성하분 등 4명을 중심으로 노사협상을 전개하면서 조선성냥(주) 이름으로 작성된 ‘임금인하무조건철회’라는 내용이 담긴 문서까지 받아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한국여성운동사에 반드시 기록해야 될 중요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인천 조선성냥공장 여성노동자들은 1932년 후반기부터 물가가 폭등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동맹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1939년 1월 1일부터 성냥공업통제가 시행되면서 노동조건이 더욱 악화되었음에도 동맹파업을 감행하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동맹파업에 가담한 전원을 해고한 다음 새로운 조건으로 신규채용하는 회사 측의 편법행위가 이들의 동맹파업 의지를 멸살시키는데 주효하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당시 조선성냥공장 여성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높은 수준이었다. 세 번째 동맹파업을 보도한 1931년 8월 26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하루 13시간 노동에 성냥껍질 1만개를 붙이고 받은 평균임금 1원70전으로는 3등 합격미 6되(1되 18전2리)·쇠고기 1근(35전)·탁주 1되(18전) 등을 사고도 10전이 남아 냉면 한 그릇(10전)을 더 먹을 수 있었다. 이것은 1931년 7월 31일 대전에서 최고임금을 받았던 목수의 하루 임금 80전보다도 두 배나 많았다. 이런 구매력은 1931년 8월 26일자 일용물가에 국한된 내용임을 전제해야만 될 것이다.
Abstract
There was a time when Inchoen used to be synonymous with the matchbox industry of Korea. A martial song with an unknown origin, called ‘Matchbox Factory Girl,’ remains as a key to illuminating the past century of Korea. The women workers of matchbox factories in Incheon went on general strike for as many as four times in protest against the Japanese exploitation of the Korean workers in the 1920s-30s. Nevertheless, they were overshadowed and ignored amid the modern industrialization movement of the 1960s, with their hard life as workers even becoming an object of foul mockery. It was their ironic fate that motivated me to write this article with a humble purpose of shedding lights on their struggle. As a precondition to understand the labor strife of the women workers of the matchbox factories in Incheon, this article re-examined such conventional views about the matchbox industry of Incheon as following: the argument of the local historians of Incheon that the first matchbox factory of Korea was set up in Incheon; and the alleged facts about the first matchbox factory set up with native capital and about the matchbox factories established in the wake of the Japanese industry’s advance to Incheon. Based on the fact-finding efforts, this article explained about the labor struggles of the women workers by dividing them into the one for their rights to live in the 1920s and the other for their labor rights in the 1930s. It gave an account for their labor conditions and wages, as well. The facts above have never been accounted for, much less being mentioned, with the records about the matchbox factories being scarce. Therefore, this article was intended to re-examine the alleged facts about the factories, mainly based on the news reports at that time. I wish that the newly found facts about the matchbox factories in Incheon in this article would help better understand the women’s rights movement of Korea and local history of Inche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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