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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註無錄과 조선전기의 檢屍

The Publication of the Shinju-Muwonrok(新註無寃錄)(The Newly Annotated Edition of the Wuyuanlu(無寃錄)) during theearly 15th Century, and the Autopsy Procedures at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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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초록

조선초기의 살인 사건 조사 과정에는 다음의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었다. 첫째, 검시와 살인사건을 조사해야 할 해당관리들이 조사를 철저하게 하지 않고 또한 검시도 직접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 검시의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셋째, 범인을 확정하는데 과학적인 방법과 엄밀한 심문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지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낸다는 것이다. 이미 살인사건의 검시절차와 방법들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중국으로부터 수입되었던 無寃錄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無寃錄이 검시 지침서로 널리 활용되지 못한 이유는 책의 독해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검시현장에서 사용해야 하는 공문서식 등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던 사정도 있었다. 우선 세종은 無寃錄의 독해를 돕는 주석을 달도록 요구하였다. 1438년 최치운 등에 의해 새로운 新註無寃錄이 완성되자 이듬해 1439년 강원도에서 인쇄하여 검시 지침서로 활용하였다. 동시에 檢屍帳式이라는 공문서 서식을 인쇄하여 널리 배포하도록 명하였다. 新註無寃錄이 일종의 검시 지침서라면 <검시장식>은 실제 검시 현장에 가지고 나가서 사체의 손상부위 등을 직접 기록하는 공문서였다. 無寃錄에 근거하여 검시절차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가장 필수적인 문서 양식이었다. 한편 新註無寃錄에는 일련의 검시과정 후 조사 전 과정을 보고서로 제출하는 방법을 기록한 初復檢驗關文式이 수록되어 있다. 元代 검시 제도가 이룩한 또 하나의 성과 중 하나인 관문식은 검시 절차에 따라 일일이 보고토록 규정한 공문서 양식으로 조선초기에도 검시는 바로 이 관문식에 의거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관문식을 통해 조선초기의 검시 과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3단계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먼저 1단계는 검시를 위해 출발하는 과정이다. 출발일시, 함께 검험하는 서리와 오작인의 성명, 시체가 놓여 있는 장소, 거리 등을 빠짐없이 기록한다.2단계는 시체가 놓인 마을에 도착하여 사건 관련자들을 마을의 主首와 里正 등으로 하여금 모두 소집하도록 하고 이들의 신상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들이 보는 앞에서 검험을 시작하고 檢屍帳式에 하나하나 사체의 상태를 기록한 후 검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명을 받아두는 단계이다.마지막 과정은 검시한 결과에 근거하여 시체의 사망 원인을 결정하는 단계이다. 시체의 검험결과를 토대로 死因을 정하고 이를 시친에게 준 후 복검이나 三檢 혹은 四檢 등의 검시에 대비하여 里正 등에게 시체를 지키도록 명령하고 다음 조사관에게 사건 관련자의 인적 상항을 알려주는 것이다.新註無寃錄은 조선 초기 간행되어 영정조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법의학의 기본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검시의 구체적인 절차, 검시과정의 엄밀성과 주의 사항등에 대한 행정절차 상의 규식뿐 아니라 다양한 원인으로 사망한 시체의 검시방법을 당시까지 축적된 과학적 지식을 수록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新註無寃錄에서 마련한 관문식이 조선후기까지 거의 변함없이 준수되었다는 점과 新註無寃錄의 과학적인 법의학 지식에 대해서 조선후기까지 별다른 異見이 없었다는 점을 안다면 그 가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無寃錄, 新註無寃錄, 檢屍, 최치운, 세종, 關門式, 檢屍狀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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