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엔드게임
Thomas Bernhards Theatersch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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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새로운 밀레니엄이 도래하기 직전, 동구권을 비롯한 공산진영이 와해되고 세상은 세기말 분위기 속에서 역사의 흐름에 또다시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다. 동유럽이 붕괴되기 시작한 1989년 여름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내셔널 인터레스트」지에 “역사의 종언” 프랜시스 후쿠야마/ 이상훈 역: 역사의 종말, 서울, 한마음사 1997. 이란 논문을 발표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자유보수주의적 학설을 대표하는 그는 사회주의제체의 붕괴와 더불어 이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이 나고 자유자본주의체제가 다른 모든 형태를 능가하는 사회체제로서 존속되리라는 가설을 들고 나왔다. 그런가 하면 푸코는 “주체의 종말”을 고한 바 있고, 파디모의 “현대성의 종말”에 이어 노베르트 볼츠가 “책의 종말”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심지어는 데리다, 크리스테바 그리고 푸코가 모두 “문학의 종말”을 진단하고 나섰다. 이미 50년대에 아놀드 겔렌이 문명의 발전단계를 묘사하면서 시대를 앞서 포스트모던적 현상의 특징을 예견했던 것은 그의 보수성을 생각하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여기에는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며 현실은 다만 과거 상황들의 연장에 지나지 않으며 더 이상의 진보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기저를 이루고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역사의 종말”이 나오던 해 삶을 마감했다. 그의 드라마를 지배하고 있는 주제를 살펴보면 그것은 우연이 아닌 듯싶다. 베른하르트의 드라마가 이러한 포스트 역사주의 내지 탈역사주의에서 지적하고 있는 현상들을 일관되게 무대화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더 이상 진보하지 않고 현재는 과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세계관은 드라마 뿐만 아니라 그의 인터뷰나 소설, 에세이 등에서 토로되고 있다. 그러한 내용은 형식적인 측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의 희곡은 외형상 고전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사건의 진전도 없는 정체상황이 지속되다가 갑작스럽게 그로테스크한 종말을 맞는 형태를 취한다. 베른하르트의 작품에서 역사가 종말을 고한 이 시대의 삶은 키에르케고르의 표현처럼 “죽음에 이르는 병 내지는 와해의 질병”으로 표현된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노쇠하고 빈약하며 질병과 신체적 장애에 시달리면서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진보 없는 역사의 답답한 상황은 정체된 시간구조와 폐쇄된 공간구조를 통해 더욱 진하게 채색된다. 하지만 그의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결코 절망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오히려 온갖 필사적인 수단을 동원해 삶을 지탱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낸다. 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종말 끝에서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전환과 돌파구를 희구하는 이들이 유희적으로 전개하는 극중극은 이런 현실의 침체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전략이다. 삶이 지닌 연극적 성격과 연극에 대한 유사성은 종종 갑작스런 파국으로 치닫는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부분 예기치 못한 시기에 삶의 마지막을 맞게 된다. 베른하르트의 연극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갑작스런 대단원은 이런 점에서 삶과 연극의 유사성을 일관성있게 테마화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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