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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民國의 版圖 形成과 티베트 -20世紀 前半期 티베트 版圖 내의 對外 開放都市와 文物交流와 관련하여-

The Territory Making of Republican China and Tibet -in Relation to the Open Cities and Cultural Exchanges of Tibet Territory in the First Half of 20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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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역사적으로 중국은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는 경우는 외교적 방식보다 힘을 바탕으로 한 팽창주의적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중앙정부가 약화될 경우는 다양한 외교적 방식을 통해 핵심적 영토주권에 대한 위협을 감소시키기 위한 방어적 전략을 추진했다.” 민국시기에 중국은 대전략의 측면에서 방어적인 전략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것은 청조의 경우에 대비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복국가 청조는 1720년 서몽골 세력을 쫓아내고 티베트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청조의 지배는 티베트 판도를 前藏, 後藏과 캄과 암도 등으로 나누어 분할 지배하는 것이었다. 청조는 달라이 라마의 교단국가의 영향력을 종교적인 차원에 묶어두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였음이 19세기 후반에 점점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티베트는 19세기 중반 이래 영국과 청조-민국 사이에서 격렬한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티베트인들은 독자적인 판도 의식과 정체성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관철시킬 만한 역량은 미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20세기 전반기에는 국제정세에 힘입어 티베트 본토 차원에서는 40년 동안 독자노선을 걸어올 수 있었다. 티베트 본토는 이 기간 동안 전통문물과 현대문물, 전통문화와 현대문화를 조화롭게 결합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영주와 불교교단세력 등 전통친화적인 지배층은 상대적으로 근대적인 개혁에 미온적이었다. 그 결과는 1951년 티베트의 중국 편입이었다. 신중국 병력의 티베트 출병 직전에 티베트는 티베트 본부만이라도 독립을 획득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노력은 실패로 끝났지만, 중국 편입 이후에 티베트인들은 중앙정부가 티베트 본부를 캄이나 암도와 분리된 지역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격렬히 저항하였다. 1959년 3월의 봉기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중국이 ‘하나의 중국’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티베트인들도 나름대로 ‘하나의 티베트’ 관념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20세기 전반기 티베트의 문물교류 통로는 주체적으로 열었던 것이 아니라, 영국의 압력에 의해 열린 것이었다. 티베트인들은 제한적으로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특히 1920년대에는 보수와 개혁 사이의 갈등으로 순조로운 개혁을 진행하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보아, 티베트는 영국과 중국 사이에서 나름대로 균형점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근대적인 개혁을 수용하기에는 티베트 사회의 내적 동기가 약한 편이었다. 티베트의 주요 수출품은 양모와 같은 농목축업의 산물이었으나, 수입하는 물품은 주로 공산품이었다. 이렇게 티베트국이 독자노선을 걸은 20세기 전반기에 티베트 문물교류의 중심 노선은 남부노선, 즉 야둥-걍쩨의 노선이었고, 그 문물교류는 주로 티베트에 서구의 외래문물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티베트측은 서구의 문물을 시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비교적 엄격하게 통제하였고, 서구 문물의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서구 문물의 유입은 티베트에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유발하였다. 티베트의 약점은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아니라 양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독립성을 유지하던 상황이 크게 변할 수 있다는 점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점에 있다고 하겠다. 20세기 전반기 티베트는 국가의 판도를 보존해야 하는 노력도 경주해야 하는 동시에 많은 개혁과제를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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