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왕묘 의례의 재현과 공연예술화 방안
Representation and performing arts plan on the ritual of Gwanwangm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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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 향사의례(享祀儀禮)는 조선후기 국가제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임진왜란 직후 우리나라에 처음 세워진 관왕묘는 국가제사 가운데 소사(小祀)로 정비된 후 정조 때 중사(中祀)로 격상되어 문묘(文廟)에 비견되는 무묘(武廟)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조선초기에 정비된 둑제(纛祭)가 소사(小祀)에 그친 것과 달리 관왕묘는 조선후기 무신들이 주관하는 최고의 제례로 자리잡아 나갔다. 그러한 경향은 1908년 관왕묘 제례가 폐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관왕묘 의례는 명나라의 요청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조선후기 국왕들이 충의의 상징으로 인식하면서 군주권 강화를 위한 상징적 의식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크다. 특히 군신의 상징으로 시작된 관우 제사는 유교적 이념과는 배치되는 주술적 의례였지만, 조선후기 대외적으로는 숭명배청와 함께 대내적으로 국왕권의 강화라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충성과 의리, 그리고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는 재인식되었다. 그 결과 관왕묘 의례는 영조대에 『국조속오례의』에 소사를 거쳐 『춘관통고』에 중사로 승격된 후 황제례에 입각한 『대한예전』에 최종 명문화되었다. 관왕묘 의례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었지만, 악가무에 맞춰 제사 의식과 절차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격조높은 유교의례의 특성을 잘 반영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특히 정대업 음악의 일부분을 취해 만든 관왕묘등가(關王廟登歌)는 제사 절차와 의식에 따라 군악(軍樂)형식의 고취 연주와 노래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만, 같은 고취악으로 제례가 이루어지는 둑제와 달리 무용의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또하나의 관왕묘인 숭의묘(西廟)에서의 일무로 추정되는 사실은 관왕묘 의례가 악가무에 바탕한 유교의례로서의 예술성을 보완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잘 아시다시피 중국에서는 관우 또는 관왕묘와 관련하여 경극, 곤극, 묘회(廟會) 등 다양한 공연예술의 소재와 축제문화의 근간으로 발달해 왔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관왕묘 제례의 재현과 무대예술화 방안은 관우를 활용한 한국식 의례 내지 공연예술로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재물신으로서의 관왕묘 향사의례 재현은 풍요로움을 욕망하는 많은 이들에게 그 자체로 매력적인 관광콘텐츠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현재 공원화되어 있는 동묘(보물 142호)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1년(선조 34)의 건물이 원형 공간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말하면, 조선시대 국가주도로 건립된 관왕묘 가운데 서울에 남아있는 곳은 동묘가 유일하다. 또한 서묘, 북묘, 남묘가 훼철되면서 그 안에 있던 소상과 기물들 상당수가 모두 동묘에 이관되어 있다. 따라서 이 공간은 동서남북의 관왕묘의 총합인 셈이다. 이는 동묘가 관왕묘 제례와 관련한 의례재현의 공간으로서의 중요한 의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무엇보다도 서울의 동묘 공간을 활용한 관왕묘 의례의 재현은 종교적 차원 보다 역사적, 문화적, 예술적인 차원의 가치와 의미가 크다는 점에서 서울 도심 속 새로운 문화콘텐츠로서 주목받을 가능성이 크다.
Abstract
Dongmyo (“East Shrine”) located outside the Heunginjimun Gate(Treasure No. 1) is a shrine established to honor Gwanu, a general under the warlord Liu Bei during the late Eastern Han Dynasty and Three Kingdoms era of China. Originally called Donggwanwangmyo (“East Shrine for Lord Gwanu”), the shrine was built just after the Imjin Waeran(1592-1598), the 7-year war between Korea and Japan that started by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in the belief that the war was won by the Joseon-Ming allied forces due to the support of the ancient Chinese warrior. The name plaque of the shrine was written and sent by a Chinese emperor. The construction of the shrine began in 1599 and completed two years later. Currently, it enshrines a wooden statue of Gwanu along with those of his four assistants including Gwangpyeong and Juchang. This article was written to represent and performing arts plan on the ritual of Gwanwangmyo. Because the ritual of Gwanwangmyo may contain a variety of artistic value and cultural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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