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ERD
논문KCI 등재

식민지 시기 조선 청진화교의 위상

The Overseas Chinese in Cheongjin, Colonial Chosun

0

조회

0

다운로드

7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주제분류기타인문학

초록

이 글은 20세기 조선 북부지역 화교에 관한 일련의 연구 중 하나로 청진화교의 위상을 원산화교와 비교하면서 서술하였다. 우선, 청진화교의 규모를 살펴보았다. 청진의 중국인은 1912년 100여 명으로 시작하였으나 1922년부터 급증하여 1925년 1천명을 돌파하였다. 이 시점 이후 청진화교 규모는 원산화교를 앞섰다. 1940년 청진부가 나남읍과 통합하여 대청진부로 확장되면서 2천명을 돌파하였고, 1941년에는 3천명을 넘어 같은 시기 원산화교에 비해 3배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만주와 조선, 일본을 연결하는 철도 유통망과 항만 시설을 갖춘 공업도시로서 청진이 주목받으면서 가능해졌다. 다음으로, 1920년대 청진화교의 경제력과 화교조직을 분석하였다. 1920년대 말 청진화교의 구심점은 다른지역과 마찬가지로 직물상이었다. 청진과 원산 두 지역의 대표적 직물상 4호의 경제력을 비교해보면, 원산이청진에 비해 약간 우위를 차지하였다. 1930년 당시 청진에는 화상상회(중화상회)를 포함하여 중화노공협회(中 華勞工協會) 청진분회, 국민당 주조선(駐朝鮮) 청진분부(分部)가 설립되었다. 마지막으로, 1930년대 발생한 배화폭동,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 외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청진화교의 위상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검토하였다. 배화폭동으로 점포를 정리한 1호를 제외하고 남은 직물상 3호는 영업을 계속하였고, 자산액은 오히려 폭동 이전에 비해 증가했다. 새롭게 부각된 직물상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화교소학교의 교동(敎董, 이사)은 중화상회 임원이 겸임하는데, 1943년 말 청진화교소학교 교동으로 기존의 직물상 외에 새롭게 직물상 2호가 포함되었다. 그 중 인합동(仁合東)은 중일전쟁 이후 중화상회 대표로 활약하였다. 청진화교 직물상은 1941년 시점에 오히려 숫자와 자산액이 늘어났다. 청진화교의 경제력은 원산화교를 이미 능가하였고 인천과 경성화교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Abstract

This paper is one of studies on the Overseas Chinese in the northern region of Colonial Chosun in the 20th century. It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Overseas Chinese in Cheongjin in comparison with Overseas Chinese in Wonsan. Firstly, I reviewed the scale of them. There had been over 100 since its opening in 1908. But it had surged to over 1,000 since 1925. After this point the scale of them surpassed Wonsan. In 1941, it exceeded 3,000 and tripled compared to Wonsan in the same period. This situation had been made possible by its attention as an industrial city with a railway network and port facilities. Secondly, I analyzed the economic power and organization of them in the 1920s. In the late 1920s, the center of them was textile merchants like Wonsan. Compared with economic power of the main 4 textile merchants in the two cities, Overseas Chinese in Wonsan was slightly superior to Cheongjin. In 1930, the Chinese Chamber of Commerce, Chinese Workers Association and Chinese National Party, Cheongjin Branch were established in Cheongjin. Lastly, I examined how the characteristics of them was transformed by changes in external circumstances such as 1931 anti-Chinese riots, Manchurian incident, and Sino-Japanese War. After the riots, the remaining 3 textile merchants, except one, continued their business. and their assets increased rather than before the riots. In general, the board of directors for Primary School for Overseas Chinese was also a director of Chinese Chamber of Commerce. At the end of 1943, according to the name of the board of directors for Primary School, the two textile merchants were newly added. Renhedong, in particular, emerged as the representative of the Chinese Chamber of Commerce after the Sino-Japanese War. Textile merchants increased in number and assets in 1941. Their economic power had already surpassed Wonsan and was catching up with Incheon and Kyungsung.

참고문헌 (48)

  1. "外交部檔案", 臺灣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檔案館 所藏, ~
  2. "駐臺灣·日本·朝鮮(韓國)領館設廢案(11-29-01-02-285)", ~
  3. "駐朝鮮使館檔", 臺灣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檔案館 所藏, ~
  4. "各華商會選擧及改組(1917年)(03-47-045-01)", ~ (1917)
  5. "橫濱元山甑南浦領事館裁撤及歸併(1927年)(03-47-159-02)", ~ (1927)
  6. "商會改選董事職員(1928年)(03-47-167-02)", ~ (1928)
  7. "淸津領事館旬報(1930年)(03-47-197-04)", ~ (1930)
  8. "僑民嘉獎案(1931年)(03-47-205-10)", ~ (1931)
  9. "元山淸津兩館工作報告(1932年)(03-47-222-01)", ~ (1932)
  10. "外国人土地法関係(4)(C08021704600)"[URL]
  11. "中華民國國民政府駐日大使館檔案(2-2744-36)", 日本東洋文庫 所藏, ~
  12. "僑民敎育", ~ (1943)
  13. 中國第二歷史檔案館, "南京國民政府外交部公報" (1990), 江蘇古籍出版社
  14. 駐淸津領事館, "淸津港沿革及華僑總數, 第3卷 第5號", ~ (1930)
  15. 駐淸津領事館, "北鮮三港淸津, 雄基, 羅津之形勢, 第7卷 第8號", ~ (1934)
  16. 駐元山副領事館, "大元山與東三省之關係(一), 第7卷 第9號", ~ (1934)
  17. 京畿道警察部長, "京城中國總領事館ノ動靜其他ニ關スル件, 京外秘 第307號", ~ (1938)
  18. 京城商業會議所, "朝鮮に於にる外國人の經濟力", 朝鮮經濟雜誌, (159) (1929)
  19. 朝鮮貿易協會, "北鮮三港及裏日本諸港と滿洲との關係" (1935), 朝鮮貿易協會
  20. 淸津商工會議所, "後方商勢圈" (1934), 淸津商工會議所
  21. 淸津商工會議所, "淸津商工會議所史" (1944), 淸津商工會議所
  22. 國井天波, "大淸津港" (1916), 元山每日新聞社
  23.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統計年報", 朝鮮總督府, ~
  24. 朝鮮總督府, "朝鮮に於ける支那人", 朝鮮總督府, ~ (1924)
  25. 商業興信所, "商工資産信用錄 第26回(1925年), 第30回(1929年), 第33回(1932年), 第38回(1937年), 第42回(1941年)", ~ (1925)
  26. 李正熙, "朝鮮華僑と近代東アジア" (2012), 京都大學学術出版會
  27. "京圖南廻線廣軌完成 卄二일 준공식", 매일신보, ~ (1934)
  28. "삼장상업계의 파산자가 속출", 조선일보, ~ (1931)
  29. 김지환, "철도로 보는 중국역사" (2014), 학고방
  30. 손정목, "한국 개항기 도시 변화과정 연구" (1982), 일지사
  31. 이정희, "한반도화교사" (2018), 동아시아
  32. 加藤圭木, "植民地期朝鮮の地域變容―日本の大陸進出と咸鏡北道" (2017), 吉川弘文館
  33. 李正熙, "朝鮮華僑と近代東アジア" (2012), 京都大學学術出版會
  34. 芳井研一, "環日本海地域社会の変容―満蒙·間島と‘裏日本’" (2000), 青木書店
  35. 고승희, "19세기 후반 함경도 변경지역과 연해주의 교역 활동", 조선시대사학보, (28), pp.159~189 (2004), 조선시대사학회
  36. 高丞嬉, "19세기후반 함경도 六鎭과 만주지역 교역의 성격", 조선시대사학보, (25), pp.173~199 (2003), 조선시대사학회
  37. 송규진, "함경선 부설과 길회선 종단항 결정이 지역경제에 끼친 영향-나진・웅기・청진을 중심으로-", 韓國史學報, (57), pp.325~357 (2014), 고려사학회
  38. 송규진, "일제강점기 ‘식민도시’ 청진 발전의 실상", 사학연구, (110), pp.327~390 (2013), 한국사학회
  39. 송규진, "일제의 대륙침략기 ‘북선루트’・‘북선3항’", 한국사연구, (163), pp.379~413 (2013), 한국사연구회
  40. 심재욱, "일제강점기 淸津의 팽창과 정어리 어업", 역사와 실학, (63), pp.133~177 (2017), 역사실학회
  41. 이은상, "중화민국 시기 주조선(駐朝鮮) 청진영사관 개관을 둘러싼 중·일(中日) 간의 교섭", 동양학, (70), pp.85~104 (2018), 동양학연구원[DOI]
  42. 이은상, "중일전쟁 시기 원산화교의 동향과 화교경제", 史叢(사총), (90), pp.127~164 (2017), 역사연구소[DOI]
  43. 이은상, "중일전쟁(中日戰爭) 이전 시기(1912∼1936) 조선의 원산화교(元山華僑)", 인문과학, (60), pp.103~147 (2016), 인문학연구원
  44. 이은상, "원산화교와 배화폭동(排華暴動)", 중국근현대사연구, (72), pp.91~117 (2016), 중국근현대사학회
  45. 陳群元, "1936年日中淸津事件の探究(1)", 政治經濟史學, 506 (2008), 日本政治經濟史學硏究所
  46. 陳群元, "1936年日中淸津事件の探究(2)", 政治經濟史學, 510 (2009), 日本政治經濟史學硏究所
  47. 陳群元, "1936年日中淸津事件の探究(3)", 政治經濟史學, 511 (2009), 日本政治經濟史學硏究所

이 간행물의 다른 논문 (8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