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이전 인천의 화교학교 교육 -‘인천화교소학’과 ‘인천노교소학’-
A Chinese School Education in Incheon
0
조회
0
다운로드
7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본 논문은 한국화교들이 이질적인 한국사회에서 화교교육을 통해 어떻게 중국 문화를 유지하고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지에 대한 화교교육사의 일환으로 시도되었다. 인천은 서울과 함께 한국화교사회에서 근대 교육의 발상지라 인식된다. 기존의 화교교육사에서 ‘1902년 인천화교소학의 설립’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를 입증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찾지 못했다. 또 1906년경 인천중화회관에서 운영하던 학당을 인천화교소학의 전신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오히려 민국 수립 이후까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 채 구식교육을 답습하거나 아예 교육의 기회조차 없는 인천 화교교육의 현실을 동정하여 1914년 인천영사와 각 동향방이 공동으로 학교를 개설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인천중화회관에 개설된 ‘인천화교공립소학교’는 현재 인천화교교육의 중심축인 인천화교소학의 전신이다. 설립 당초에는 修身 과목이 여전히 교과내용에 포함되었지만 화교교육이 근대적인 학교체제내로 편입되는 단서를 마련했다. 또 과거 교육에서 소외되었던 빈곤층이나 여아 등도 교육대상에 포함될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특히 여학생의 ‘반값 학비’ 규정은 서울 화교소학 규정에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편 1930년 1월 인천산동동향회는 동향회관내에 의무교육으로 ‘인천노교소학’을 세웠다. 일반적으로 인천화교소학을 둘러싼 남방과 북방 지도 그룹간의 세력 다툼과 대립이 노교소학의 설립 배경으로 설명되곤 한다. 원래 동향방의 활동은 자선구제나 학교설립지원 등을 통해 상호 부조와 단결력을 공고히 하는데 있다. 이에 인천화교소학의 학비는 학부형의 경제력에 따라 차등을 두도록 규정되었다. 다만 재정상 학비 면제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도, 또 교동을 통해 자금 조달을 확대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로부터 산동동향회는 스스로 학교를 설립하여 빈곤한 동향인 자제에 대한 의무교육을 지원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화교사회의 성장배경에는 지역을 불문하고 동향방과 상회라는 지연, 업연의 사회단체가 주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위의 두 단체가 주를 이루다가 이민인구가 많아지고 직업도 다양화하면서 다양한 화교사회단체가 출현했다. 중화노공협회, 농업공의회 등은 1920년대까지 화교사회에서 상회와 같은 적극적 역할은 없었다고 보이지만, 1931년 중화노공협회 인천지부장이 인천화교소학의 교동으로 추대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상인을 중심으로 한 인천화교사회의 구성에 점차 변화가 있었으며, 이러한 변화가 화교학교의 교동구성이나 운영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화교사회와 화교교육을 이해하는데 중국 본국정부와의 관계를 간과할 수 없다. 중국 정부의 해외화교에 대한 정책은 인천의 화교학교 설립, 지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13년 12월 북경정부 교육부가 각지 영사에게 화교학교 전반에 대해 지도하고 개입,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14년 인천영사와 각 幇이 공동으로 인천화교소학을 세웠고, 설립 당초 학교 규모나 교학 설비 면에서는 부족했지만 영사관 수입의 보조를 기반으로 1930년에 이르기까지 경상경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1928년 국민정부 수립 이후에는 국민당의 통치이념을 교육체제 내에 구현하려는 목표가 인천의 화교학교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총영사관부설의 한성화교학교와 마찬가지로 ‘공립 성질’의 인천화교소학도, ‘사립’의 인천노교소학도 교과과정에 당의과목이 추가되었다. 삼민주의 교육이 법 규정에 따라 정규학교 체계로 들어왔고, 삼민주의 국민교육은 한국화교들에게 중국인 의식을 불어넣고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시키는데 유리했다.
Abstract
.
참고문헌 (18)
- "駐朝鮮使館檔, 學務, 人事, 商務, 僑務 各卷", 臺灣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檔案館, ~
- "「朝鮮檔」館藏號 01-19-011-02-030", 臺灣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檔案館, ~
- "朝鮮總督府外事課기록물, 관리번호 CJA0002323", 국가기록원, ~
- 中國第2歷史檔案館, , 南京國民政府外交部公報, 3(4) (1990), 江蘇古籍出版社
- 華僑志編纂委員會, "華僑志-韓國編" (1958)
- "동아일보, 1931.4.15", ~ (1931)
- "경인일보, 2015.1.30", ~ (2015)
- 김중규, "화교학교의 역사를 통해서 본 화교문화의 형성과 변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13(1), pp.359~402 (2010), 역사문화학회
- 김희신, "20세기 초기(1912-1931년) 한국 화교교육의 역사와 화교사회- 서울지역 화교소학을 중심으로 -", 중국학보, (77), pp.341~378 (2016), 한국중국학회
- 김희신, "華僑, 華僑 네트워크와 駐韓使館 -청일전쟁 이후 한성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사연구, (89), pp.285~332 (2014), 중국사학회
- 송승석, "1945년 이전 仁川의 華僑敎育과 華僑社會 - 仁川華僑小學을 중심으로 -", 역사교육, (124), pp.209~237 (2012), 역사교육연구회
- 왕언메이, "동남아화교와동북아화교 마주보기" (2015), 학고방
- 이재광, "韓國華僑의 歷史와 文化 正體性- 華僑敎育을 中心으로 -", 중국학연구, (30), pp.571~594 (2004), 중국학연구회
- 이정희, "중일전쟁과 조선화교―조선의 화교소학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35), pp.107~129 (2007), 중국근현대사학회
- 강진아, "동순태호" (2011), 경북대출판부
- 이정희,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를 중심으로-" (2015), 학고방
- 楊昭全, "朝鮮華僑史" (1991), 中國華僑出版公司
- 杜書簿, "仁川華僑敎育百年史" (2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