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세기 고구려인 포로 집단의 중국 내지 이동 및 활동 - 중원왕조의 對이민족 정책을 중심으로 한 문제 제기
안현선
초록
이 글은 문헌사료 및 출토자료에서 보이는 고구려인 포로 집단의 중국 내지로의 이동을 종합하고 각 중원왕조가 실천한 이민족 정책을 비교 검토한 것이다.
3~7세기 고구려인 포로 집단의 중국 내지로의 유입은 중원왕조와의 대립 과정에서 발생한 강제 이주였다. 그러나 그들이 안치된 지역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우선 曹魏 正始 연간(244~246) 유주자사 관구검에 의해 중원 지역으로 들어온 고구려인 포로 집단은 수도 낙양의 동쪽 방어 거점 지역인 滎陽에 안치되었다. 그 다음 강제 이주가 이루어진 4세기에는 요서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慕容部 세력에 의해 정복당한 扶餘, 宇文部, 段部 등의 집단과 함께 모용부 정권의 주요 근거지인 龍城과 棘城에 안치되었다. 이후에 그중 일부는 전연 모용황의 정책에 의해 도성 서쪽 경계 지역 및 새로운 수도 中山 및 鄴城 일대로 옮겨진다. 또한 4세기 말에는 山東 지역 일대로 옮겨진 고구려인 포로 집단이 다시 한번 이동하게 된다. 北魏 道 武帝는 後燕의 수도 中山을 정복하고 山東六州에 있던 漢族 및 모용부, 고구려인 포로 집단을 수도인 平城으로 이주시켰다. 마지막으로 고구려 멸망 후에는 고구려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분리되었다. 피지배층은 중국 각 지역의 공한지에 分置되었고, 일부를 제외한 지배층은 당의 관직을 제수 받아 수도인 長安 일대에 본적지를 두게 하였다.
한편 중원 내 고구려인의 활동은 본국의 지배층이었던 인물에게 집중된다. 前燕의 質子로 보내진 고구려인은 단순히 인질이라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황제의 측근에서 宿衛하면서 황제와의 군신 관계를 구축하였다. 이후 북위대에는 일정 수의 고구려인 포로 집단을 통솔하는 長으로서 중원 내에서 세력을 유지하였으나 孝文帝의 漢化政策 이후 그 입지가 크게 축소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唐代에는 고구려인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泉男生과 李他仁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의 故地를 按撫(반란 방지 및 신라 견제)하는 그룹과 高質과 高足酉로 대표되는 당의 中央十六衛 무관직에 배속되어 다양한 대외 원정에 동원되는 그룹이다. 이들의 활동은 7세기 말까지 집중되며, 그들의자손은 부친 등의 官品에 의한 恩蔭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는 고구려인뿐만 아니라 당시 주요 非漢民族이었던 突厥과 靺鞨, 소그드인, 동시기에 멸망한 百濟人 등의 행적과 유사한 특징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