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太祖 影幀 모사와 漢陽 眞殿(南別殿) 수립- 永禧殿의 역사적 연원에 대한 고찰 -
King Gwanghaegun’s Enshrinement of the Founder King Taejo’s Portrait, and the Foundation of the Hanyang Jinjeon(眞殿) Facility(The South Side Special Chamber “Nambyeoljeon(南別殿)”)-Examination of the historical nature of Yeonghijeon(永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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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고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태조 진전의 복구과정에서 한양의 남별전에 태조의 영정이 봉안되는 경위와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진전의 복구는 영정이 남아 있던 경기전부터 시작되었다. 광해군 6년 전주에 진전을 복구하고 영변부에 봉안되어 있었던 어진을 환봉하였다. 파괴된 전각의 복구, 제자리를 떠난 태조 영정의 환봉은 전란을 극복한 中興의 표상이었다. 이는 세자로서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끈 광해군의 공업을 현창하는 의미도 있었다. 이후 평양의 영숭전을 복구하는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전각은 광해군 8년 복구되었으며, 이후 화원을 전주로 보내 경기전 영정을 모사한 뒤 평양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영정 모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영정 봉송은 난항을 겪다가 결국 안전한 강화도에 봉안한다는 명분으로 한양의 남별전에 봉안되었다. 평양의 진전을 복구하도록 한 것은 후금의 발흥으로 전쟁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임진왜란의 중심에 있던 평양의 민심을 수습하고 중흥의 군주로서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영정 봉송이 한양 봉안으로 선회한 것 역시 광해군의 정치적인 의도가 강하게 투영된 것이었다. 광해군은 모사된 영정이 전주를 출발하기 직전 태조 영정을 한양에 봉안할 장소로 奉慈殿을 선택하였다. 봉자전은 생모인 恭嬪을 왕후로 추존한 후 설치한 神殿으로서 광해군의 왕위 정통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이곳에 태조의 영정과 함께 세조 영정을 봉안함으로써 봉자전은 도성내 진전의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 남별전으로의 전호 교체는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례를 바탕으로 광해군은 仁穆大妃의 廢黜, 곧 廢母논의를 전개하였으며, 정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폐모론의 전개는 영숭전 영정이 모사되어 한양으로 봉송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결국 광해군은 창업주 태조 영정을 한양의 봉자전(남별전)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이 종묘에 부묘된 恭聖王后의 정통성을 보강하고자 한 것이다.
Abstract
Examined in this article is the process of restoring the Taejo Jinjeon structure, which was incinerated during the war with the Japanese in the 1590s, as well as the procedure in which the founder king Taejo’s portrait was enshrined at the South Side Special Chamber (“Nambyeoljeon, 南別殿”) inside the Hanyang capital. Restoration of the Jinjeon structure began with the Gyeonggijeon shrine where the portrait remained for the time being, and eventually led to the task of restoring the Yeongsungjeon structure in Pyeong’yang. Reconstruction of the destroyed shrines, and bringing Taejo’s portrait back to the place it belonged, symbolized the victorious end of the war and also a revitalization of the country itself. It also served as a reminder to King Gwanghaegun’s meritorious deeds as Crown prince which helped defeat the Japanese. It was a highly political decision to enshrine the Founder’s portrait in Hanyang. Gwanghaegun enshrined the founder king’s portrait at the Bongja-jeon shrine(Nambyeoljeon), which was also a divine shrine(神殿) for his own birth mother Concubine Gongbin(恭嬪). By doing so he intended to reinforce the legitimate nature of Queen Gongseong, whose tablet was newly added to the dynastic shrine. His action also later provided a justification for expelling Queen Inmok, and restructuring the inside of the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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