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위덕왕대 王弟 季의 활동과 왕위 계승
The Role of King’s Brother Gye and Succession of the Throne in the Reign of King Wideok of Baekje
0
조회
0
다운로드
2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百濟 泗沘時代의 정치사는 管山城 패전을 겪으면서 왕권이 동요한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이것은 『三國遺事』 武王條를 중요한 사료로 받아들이면서 무왕이 정상적인 왕위 계승을 하지 못하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왕조는 기본적으로 彌勒寺 창건에 대한 연기설화라고 보아야 한다.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한 사실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新羅의 영향을 강조하는 내용들이 덧붙여지면서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무왕은 역시 『三國史記』의 기록처럼 法王의 아들로서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법왕의 아버지이자 威德王의 아우인 季(惠王)의 존재가 주목되는 것이다. 백제는 관산성에서 패전을 겪었지만, 扶餘 陵山里 寺址의 「昌王銘石造舍利龕」銘文을 통하여 위덕왕대 왕권이 聖王系 왕족을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면에는 위덕왕의 同氣들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계는 성왕계 왕족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계는 관산성 패전 직후인 위덕왕 2년(555)에 청병사 자격으로 倭에 파견되었다. 비록 대규모 청병에는 실패하였지만, 왜에 머물면서 정권의 유력 씨족인 蘇我氏 세력과 사적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또한 이듬해에 호위 성격의 군사집단과 귀국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외교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이후에 백제와 왜의 교섭이 20여 년간 공백기를 맞이하였지만, 한반도 정세의 변화로 위덕왕 22년(575)에 對倭 교섭이 재개되었다. 여전히 백제에게 대왜 교섭은 중요하였으며, 계의 역할과 영향력도 점차 증대되었을 것이다. 扶餘 王興寺址에서 출토된 「靑銅製舍利盒」명문은 위덕왕 24년(577)에 왕자가 사망한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사찰 건립과 사리봉안의식을 주도적으로 행하였다. 이는 죽은 왕자가 위덕왕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위덕왕은 유일한 아들이 사망하자, 성왕계 왕족의 핵심이며 자신의 왕권을 뒷받침해왔던 계를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위덕왕대에 이루어진 왕제 계의 역할과 그의 왕위 계승은 백제말기를 새로운 왕계로 이끌게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축적된 힘은 훗날 무왕과 義慈王代 왕권강화의 토대로 작용하였으며, 더 나아가 백제가 다시 한 번 중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Abstract
It has been understood that Baekje was in a state of confusion after the defeat of the battle in Gwansan fortress (554 CE) because it was considered King Mu (600-641 CE) came to throne unexpectedly according to the article of King Mu, Samguk Yusa. However, the article should be viewed as a tale that explains the origin of Mireuk temple. Based on Samguk Sagi, King Mu succeeded the throne as a son of King Beop (599-600 CE) who was a son of King Hye (598-599 CE), that is Gye. Gye was a younger brother of King Wideok (554-598 CE), that is Chang. According to King Chang’s inscription on stone reliquary excavated from the temple site in Neungsan-ri, Buyeo, it can be understood that king’s authority was sustained on the basis of the King Seong’s royal lineage. Gye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especially in the field of the relation with Wa (Japan). After the defeat of the battle in Gwansan fortress, Gye was delegated to Japan as an envoy. Although he failed to receive military assistance, he developed personal relationship with Soga family which was the government’s major political party. Followed by a year, he returned back with a small group of troops as escort, that showed his political and diplomatic capability. Although the interrelation between Baekje and Japan ceased for 20 years, it resumed in 575 CE following the change of political situation at Korean peninsula. The relationship with Japan was still important with Baekje in this period, so Gye’s role and influence expanded. The inscription on bronze reliquary excavated in ‘Wangheung temple site’ in Buyeo has confirmed the fact that the prince of King Wideok has passed away in 577. After the death of King Wideok’s only prince, the king accepted Gye as his successor. The role of the King’s Brother Gye in the king Wideok period and his succession to the throne led to a new genealogy of kings in the late Baekje Kingdom. In addition, the powers accumulated during this period later became the basis for the strengthening of the royal authority of King Mu and King Euija (641-660 CE), and furthermore, Baekje was the driving force for the revival of the kingdom.
참고문헌 (67)
- "三國史記", ~
- "三國遺事", ~
- "日本書紀", ~
- "隋書", ~
- "北史", ~
- "翰苑", ~
- "「扶餘 陵山里 寺址 昌王銘石造舍利龕」銘文", ~
- "「扶餘 王興寺址 靑銅製舍利盒」銘文", ~
- "益山 彌勒寺址 石塔 金製舍利奉安記", ~
- 彌勒寺 -遺蹟發掘調査報告書 Ⅱ-, "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 (1996)
- 彌勒寺址 西塔 -周邊發掘調査 報告書-, "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 (2001)
- 王興寺址 Ⅱ -기와 가마터 發掘調査 報告書-, "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 (2007)
- 益山彌勒寺址 東塔址 -基壇 및 下部調査報告書-, "扶餘文化財硏究所", ~ (1992)
- 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國家形成과 支配體制의 變遷을 中心으로-" (1988), 一潮閣
- 편집부(국사편찬위원회), "中國正史 朝鮮傳 譯註 二" (2004), 국사편찬위원회
- 姜珉植, "薯童說話의 생성과 전개", 先史와 古代, 19 (2003), 한국고대학회
- 강봉원, "백제 무왕과 ‘서동’의 관계 재검토 -신라와 백제의 정치·군사적 관계를 중심으로-", 白山學報, 63 (2002), 백산학회
- 강종원, "百濟 武王의 出系와 王位繼承", 역사와 담론, (56), pp.3~37 (2010), 호서사학회
- 길기태, "百濟 威德王의 陵山里寺院 創建과 祭儀", 백제문화, 2(41), pp.5~34 (2009), 백제문화연구소[DOI]
- 김기섭, "백제의 왕위계승과 ‘二子’", 京畿 史學, 8 (2004), 경기대학교 경기사학회
- 金杜珍, "百濟의 彌勒信仰과 戒律" (1993),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김두진, "삼국유사의 인용문과 그 성격", 사학연구, (76), pp.85~122 (2004), 한국사학회
- 김병남, "百濟 威德王代의 정치 상황과 대외 관계", 한국상고사학보, 43(43), pp.55~72 (2004), 한국상고사학회
- 김복순, "『삼국유사』 속의 『삼국사기』", 동국사학, (62), pp.363~409 (2017), 동국역사문화연구소[DOI]
- 金三龍, "彌勒寺 創建에 對한 彌勒信仰的 背景", 馬韓, 百濟文化, 1,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 金壽泰, "百濟 武王代의 政治勢力", 馬韓, 百濟文化, 14 (1999),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 金壽泰, "百濟 威德王代 扶餘 陵山里 寺院의 創建", 백제문화, 27 (1998),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 김수태, "百濟 威德王의 정치와 외교", 한국인물사연구, 2 (2004), 한국인물사연구소
- 김영심, "舍利器 銘文을 통해 본 백제 사비시기 국왕과 귀족세력의 권력관계 - 沙氏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한국사연구, (163), pp.1~39 (2013), 한국사연구회
- 金煐泰, "彌勒寺 創建 緣起說話考", 馬韓, 百濟文化, 1 (1975),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 金煐泰, "百濟 琳聖太子와 妙見信仰의 日本傳授 일본전수", 佛敎學報, 20 (1983),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 金周成, "百濟 사비時代 政治史 硏究", 박사, 사학, pp.1990
- 김현구,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Ⅱ)" (2003), 일지사
- 김현수, "6세기 백제의 대왜외교 양상과 의미", 한국학논총, 34, pp.131~167 (2010), 한국학연구소
- 나종우, "百濟史上에 있어서 益山의 位置", 백제문화, 26 (1997),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 盧重國, "백제무령왕릉", pp.43~45 (1991),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 노중국, "백제의 骨族 의식과 골족 範圍", 한국고대사연구, (50), pp.193~232 (2008), 한국고대사학회
- 盧重國, "三國遺事 武王條의 再檢討 -泗沘時代後期 百濟支配體制와 關聯하여-", 韓國傳統文化硏究, 2 (1986), 대구가톨릭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 노중국, "益山지역 정치체의 史的 전개와 百濟史上의 益山勢力", 馬韓, 百濟文化, 15 (2001),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 양기석, "百濟 王興寺의 創建과 變遷", 백제문화, 2(41), pp.35~61 (2009), 백제문화연구소[DOI]
- 梁起錫, "百濟 威德王代 王權의 存在形態와 性格", 百濟硏究, 21 (1990),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梁起錫, "百濟 威德王代의 對外關係 -對中關係를 중심으로-", 先史와 古代, 19 (2003), 한국고대학회
- 문안식, "의자왕의 친위정변과 국정쇄신", 동국사학, (47), pp.55~92 (2009), 동국역사문화연구소[DOI]
- 박민경, "武王·義慈王代 政局運營의 硏究", 韓國古代史硏究, 20 (2000), 한국고대사학회
- 박재용, "6세기 고대일본 백제계 渡倭人과 불교", 백제문화, 1(50), pp.55~73 (2014), 백제문화연구소[DOI]
- 박재용, "고대 일본의 蘇我氏와 百濟系 씨족", 한국고대사연구, (86), pp.195~238 (2017), 한국고대사학회[DOI]
- 박찬흥, "임나 문제와 한일관계" (2005), 경인문화사
- 박현숙, "6세기 백제와 일본의 문물 교류와 그 배경", 민족문화연구, (45), pp.387~412 (2006), 민족문화연구원
- 朴賢淑, "임나 문제와 한일관계" (2005), 경인문화사
- 박현숙, "百濟 武王의 益山 경영과 彌勒寺", 韓國史學報, (36), pp.329~355 (2009), 고려사학회
- 신광섭, "백제 사비시대 능사 연구", 박사, 한국사, pp.2006
- 梁起錫, "百濟 聖王代의 政治改革과 그 性格 -專制王權의 成立問題와 관련하여-", 韓國古代史硏究, 4 (1990), 한국고대사학회
- 연민수, "역주 일본서기 2" (2013), 동북아역사재단
- 延敏洙, "임나 문제와 한일관계" (2005), 경인문화사
- 이내옥, "미륵사와 서동설화", 역사학보, (188), pp.29~57 (2005), 역사학회
- 이도학, "<王興寺址 舍利器 銘文> 分析을 통해 본 百濟 威德王代의 政治와 佛敎", 한국사연구, (142), pp.1~31 (2008), 한국사연구회
- 李道學, "百濟 武王代 益山 遷都說의 再解釋", 馬韓, 百濟文化, 16 (2004),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 이도학, "특집논문 : 백제 무왕과 그의시대 ; 백제(百濟) 무왕(武王)의 계보(系譜)와 집권(執權) 기반(基盤)", 백제문화, (34), pp.69~85 (2005), 백제문화연구소
- 李丙燾, "百濟彌勒寺址의 創建年代에 대하여", 馬韓, 百濟文化, 1 (1975),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 李丙燾, "薯童 說話에 對한 新考察", 歷史學報, 1 (1952), 歷史學會
- 이장웅, "百濟의 馬韓 薯童(武康王) 神話 수용과 益山 彌勒寺", 역사민속학, (38), pp.7~48 (2012), 한국역사민속학회
- 장미애, "무왕의 세력기반으로서 익산의 위상과 의미", 한국고대사연구, (60), pp.159~196 (2010), 한국고대사학회
- 장미애, "위덕왕대 혜왕계 정치세력의 성장과 성격에 대하여", 역사와 현실, (80), pp.51~91 (2011), 한국역사연구회
- 조경철, "백제 왕흥사의 창건과정과 미륵사", 史叢, (70), pp.1~27 (2010), 역사학연구회
- 채상식, "『삼국유사』의 찬술 기반", 韓國史學史學報, (35), pp.31~54 (2017), 한국사학사학회
- 黃壽永, "百濟의 建築美術", 百濟硏究, 2 (1971),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黃壽永, "百濟帝釋寺址 硏究", 百濟硏究, 4 (1973),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