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안지역 3·1운동의 사회경제적 배경
慶南咸安地域における3·1運動の社會經濟的背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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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함안지방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초순부터 4월 초순에 집중되어 일어났다. 함안지방의 3.1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다른 지역보다 일제의 식민지 행정기관에 대한 공격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점이다. 본고에서는 3.1 운동을 전후 했던 시기 함안지방의 사회경제적 배경 등이 구체적 운동 양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학인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함안지역의 토지 소유 관계와 농업 상황, 그리고 상업적 배경을 중점적으로 보았다. 함안지방 농민구성을 분석한 결과 이곳에는 지주·소작관계에 의거한 대토지 소유자는 매우 적었으며, 함안지방은 자작농과 자작겸소작농이 타지역보다 많았으며 이들이 주도가 되어 3·1운동을 추진하였다그리고 함안지방에는 토지조사사업기 많은 토지가 일본인들에 넘어가게 되었다는 점을 밝힐 수 있었다. 1914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인들은 함안군의 토지를 대규모로 집적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함안 군민들과 상당한 마찰을 일으켰고 이 점이 함안군민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한편으로는 함안지역의 지주․소작 관계와 농업경영 상황을 분석하였다. 함안군에는 3·1운동 이전까지 구래의 지주·소작관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지주들은 신분적 상하의식에 입각해 소작농에 대한 봉건적 지배를 하고 있었다. 그같은 지배관계는 3·1운동 때 대규모의 인원이 조직적으로 참여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함안 3·1운동에서 운동양상이 폭력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사회경제적으로 분석한 결과, 함안의 농민들은 1호당 1정보 미만의 소규모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다. 함안의 소작농들은 경영규모나 소출이 경남의 다른 지역 보다는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생활이 매우 궁핍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조건은 함안군의 운동양상이 폭력적으로 나아게 하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는 함안지방이 가지는 지리적 이점을 들 수 있다.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면서 일찍이 교통과 물화유통의 중심지였던 함안지방에는, 대부분의 만세시위가 장시 개시일에 일어났다. 특히 1919년 3월 9일 연계시장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알려졌는데, 연개장터는 해상과 육상을 연계하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농산물과 해산물이 집결되면서 교역이 활발히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Abstract
3.1運動は我が民族の独立に対する意志が噴出されて歴史の流れを変えた大事件だ。正義と引導の理念の下に発現された3.1運動は階級と階層を選り分けなかったことで、言葉とおり'民族全体的'で起きた。3.1運動は初期に非暴力平和デモで大衆化段階に倒れれば暴力的示威運動に展開される様相を見せてくれるのが一般的展開過程だったと言える。このように初段階の平和的様相で二番目暴力的段階に進む典型的な例が慶南咸安地域の 3.1運動だと言える。 咸安地方の万歳デモは運動が最高点に達した1919年3月初旬から4月初旬に集中されて起きた。3月上旬から4月上旬まで咸安地域では10回近い示威運動が発生した。咸安地方の3.1運動の様相で一番著しい特徴は他の地域よりデモ的性格の万歳運動と暴力デモが一緒に起こったし、日帝殖民行政機関と官公吏に対する攻撃が集中的に現われたという点だ。3.1運動当時日帝殖民統治機関が集中的に襲撃された理由は政策を指示する最末団にあるのに韓国民と直接ぶつかり合って日帝の植民政策を伝達して実践する役目を担当したからだった。慶南咸安地域で展開された3.1運動は平和デモで日帝の官公署と官公吏に対する破壊と暴力を振るうによって、日帝が無力を使って強制的に押えた。このようなデモ過程で数百人が投獄されて 郡北面デモでは 20人が集団で虐殺されるなど多くの犠牲者を出すようになった。 本稿では3.1運動を前後した時期咸安地方の社会経済的背景などが具体的運動様相とどのようにお互いに照応して明らかにしようとした。このために咸安地域の土地所有関係と農業状況、そして商業的背景を重點的に見た。本稿では次のような結論を導出することができた。 第一、咸安地方農民構成を分析した結果、こちらには地主小作関係に基づいた大土地持ち主は非常に少なかったし、自作農と自作かたがた小作農が他地域より多かったし人々が主導になって3.1運動を推進した。第二、3.1運動以前日本人の土地所有様相を土地台帳を通じて調査した結果、咸安地方には土地調査事業期多い土地が日本人たちに移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点を明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た。1914年を前後した時期日本人たちは咸安郡の土地を大規模で集積したし、この過程で咸安郡民たちと相当な摩擦を起こした。この点が咸安郡民たちが3.1運動に積極的に参加した原因になった。第三、咸安郡には3.1運動以前まで旧来の地主小作関係がそのまま維持されていたし、地主たちは身分的上下意識に即して小作農に対する封建的支配をしていた。そのような支配関係は3.1運動の時の大規模の人員が組織的に参加するようにした原因になった。また咸安地域3.1運動で運動様相が暴力的に現われるしかなかった理由を社会経済的に分析した結果、咸安の農民たちは1号当たり1情報未満の小規模土地を耕作していた。咸安の小作農たちは経営規模や収穫が慶南の他の地域よりは相対的に低かったし生活が非常に貧しかったということを意味する。このような条件は咸安郡の運動様相が暴力的に進む社会経済的背景になったことと見える。第四、洛東江と南江が合流して交通と物貨流通の中心地だった咸安地方には大部分の万歳デモが長市開始日に起こった。特に1919年3月9日連携市場で最初の万歳デモが起こったし知られたが、ヨンゲザント(‘연개장터’)は海上と陸上を連携する交通の中心地だから農産物と海産物が集結されながら交易が活発に展開された可能性が非常に高いと判断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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