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시기 尙書 ‘奏事’와 그 운영
A Study of the Zoushi(奏事) in Six Dynas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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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後漢이래 魏ㆍ晉에 이르기까지 왕조국가의 문서행정에서 신하가 황제에게 上達 가능한 문서들로는 章, 表, 奏, 啓, 疏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문서 각각의 사용 원칙과 분류 체계는 불분명했다. 국정의 운영과 관련한 보고는 奏 뿐만 아니라 表, 啓, 疏 등으로도 이루어졌고, 이들 문서들은 혼용되었다. 後漢, 魏晉에서 奏는 表나 啓의 다른 표현이었다. 奏가 공식문서로서 별도의 지위를 확립하게 된 것은 남조시대의 일이다. 남조에서의 奏는 尙書臺의 ‘奏事’와 御史臺의 ‘彈奏’를 의미했다. 尙書臺와 御史臺 이외의 관료나 官司는 奏事를 사용할 수 없었다. 즉 奏를 작성할 수 있는 주체는 尙書臺와 御史臺, 兩臺에 한정되었다. 특히 尙書臺의 奏事가 문서행정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는 尙書가 전국의 행정사무를 총괄했기 때문이다. 국정의 처리를 위해 황제의 인지를 要하거나, 황제의 승인을 요하는 사안의 보고는 반드시 尙書의 奏事를 통해 이루어졌다. 설령 중앙이나 지방의 官司에서 ‘上言’이나 ‘啓’가 올라와도 이는 尙書로 접수되어 ‘奏事’의 형식으로 정리, 가공 된 후, 황제에게 上達되었다. 이 奏事는 尙書가 다른 官司로부터 수령한 문서를 복제한 것이 아니었다. 尙書에서는 해당 안건에 대한 입장을 奏事 내에 첨부했다. 이러한 尙書의 견해는 ‘議’라고 하는 절차를 통해 도출되었다. ‘議’는 尙書가 某種의 안건과 관련한 처리를 놓고 관료들의 의견을 참고하기 위해 개최하는 일종의 여론수렴 절차다. 尙書는 ‘議’에서 제기된 의견들을 검토한 후, 가장 타당하다고 판단되는 견해를 선택하여 인용하고 이를 선택하게 된 근거를 함께 첨부하여 황제에게 보고한다. 尙書의 奏事는 중앙 또는 지방에서 올라온 문제제기, 議를 통한 검토, 尙書의 최종적 판단의 과정을 통해 작성되고, 각각의 단계에 상응하는 문서들이 奏事 내에 인용되었다. 먼저 尙書가 중앙 또는 지방의 官司로부터 접수한 문서, 다음이 ‘議文’, 그리고 마지막이 ‘議’에 대한 尙書의 입장 표명이다. 따라서 尙書의 奏事는 관료 개인의 명의가 아닌, 尙書臺라고 하는 관료기구의 명의로 작성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작성 방식상의 특수함으로 인해 尙書의 奏事는 表나 章, 啓와 같은 관료 한 사람의 명의로 작성되는 다른 문서들과 달리, 문예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없고 개인의 작품으로도 전해질 수 없었다. 남조에서 奏事가 공식문서로서 독립한 것은 이상과 같은 奏事의 작성 과정, 그리고 尙書가 국정운영의 중추로 기능했던 당시의 정치제도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尙書의 奏事제도는 남조 전시기에 걸쳐 유지되었다. 이는 남조의 士人들의 정무의 보고는 尙書의 奏事라는 창구를 통해 일원화 되어야 하고, 황제는 이 奏事를 통해 정무를 파악하고 처리하는 것이 이상적인 국정운영이라고 의식했기 때문이다. 국정을 방기하거나 자의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던 황제들도 尙書 奏事제도 자체를 폐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다만 尙書 奏事의 열람을 회피하거나 결제를 미루는 소극적인 방식을 통해 奏事제도를 무력화하고자 했다. 이는 남조에서 황제를 대상으로 한 모든 정무의 보고는 尙書라고 하는 公的인 기구를 통해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이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었음을 방증한다. 다만 이러한 제도의 운영을 통해 의도한 정치적 목적을 황제의 독단적인 국정운영 방지, 또는 尙書로 대표되는 관료사회 여론의 수용 강제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尙書의 奏事가 문서행정에서 갖는 규제력은 황제의 승인여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尙書의 奏事를 승인하지 않으면 尙書의 奏事는 어떠한 법적 효력을 갖지 못했다. 남조에서 尙書 奏事제도의 운영은 황제가 不要不急한 안건의 처리를 尙書에 위탁함으로써 처리해야 할 정무의 양적 부담을 경감하고, 국정의 운영에 있어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차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Abstract
后汉以来直至魏ㆍ晉时期, 王朝国家的文书行政作为臣子向呈上的文书, 其中包括章、表、奏、啓和疏等. 但这些文书的使用原则和分类体系并不明确. 有关国政运营相关的报告不仅包括奏, 还包括表、啓和疏等形式, 从而这些文书被混用. 后汉、魏晉的奏则以表或啓的方式来表达. 奏的定位确立为正式文书是在南朝时代. 在南朝奏意味着尙書臺的“奏事”和御史臺的“彈奏”. 除尙書臺和御史臺以外的官僚及官司不可使用奏事. 也就是说, 可书写奏的主体只限于尙書臺和御史臺等兩臺. 特别是尙書臺的奏事普通用于文书行政中, 并由尙書主管全国的行政事务. 为处理国政需要皇帝的知会或需要皇帝批准的情况务必要通过尙書的奏事才可成行. 即使中央或地方的官司呈上“上言”或“啓”, 这也将被尙書接收按“奏事”形式进行整理和加工以后上达到皇帝手中. 该奏事并非尙書将自其它官司接收的文书进行复制的文书. 尙書在奏事内添加了有关相关事项的立场. 这一尙書的见解通过被称为“議”的流程得出. “議”指的是, 尙書为就某種事项进行相应处理来参考官僚的意见而举行的一种征求意见的流程. 尙書就“議“中提出的各种建议进行审核以后, 选择认为较为合理的建议来引用并添加选择的根据以后上呈到皇帝手中. 尙書的奏事通过从中央或地方提出建议, 并通过議来进行审核, 然后经尙書最终判断等过程来编写, 且与各不同阶段相应的文书被引用到奏事中. 首先, 尙書自中央或地方官司接收文书, 然后就进行“議文”, 而最后则是尚书对“議”发表意见. 因而, 尙書奏事的编写并非以个人名义, 而只得以尙書臺这个官僚机构的名义来进行. 正因这一编写方式的特殊性, 使得尙書的奏事与表及章和啓等以官僚个人名义编写的其他文书不同, 无法追求文章的美也无法作为个人的作品来流传. 在南朝奏事作为正式文书能够保持独立的背景包括上述奏事编写过程以及尙書可作为国政运营的中枢的当时政治制度. 尙書的奏事制度在南朝自始至终得以维持. 这是因南朝士人们的政务报告应通过尙書奏事这个窗口一元化, 而皇帝则通过该奏事掌握政务才是理想的国政运营的意识所致. 忽视国政或欲随意运营国政的皇帝也未自行废除尙書奏事制度. 他们只不过通过回避阅览尙書的奏事或延误批文等消极的方式来企图使奏事制度变得衰弱. 这也证明在南朝面向皇帝的所有政务报告应通过尙書这个正式机构来完成的原则定位很明确. 但认为通过这一制度的运营所希望达到的政治性目的在于防止皇帝对国政运营独断专行或以尙書为代表的官僚社会舆论的强制性接受的观点有些牵强. 因为尙書的奏事在文书行政方面具有的控制力取决于皇帝的批准与否. 皇帝若不批准尙書的奏事, 尙書的奏事则无法具有法律效力. 因此有必要认为, 南朝的尙書奏事制度运营方式是皇帝将并不太紧急的批文委托给尙書, 以此来减轻政务处理量, 并在国政运营方面确保流程的正当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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